이 글은 이집트의 주요 정치 행위자를 정부, 무슬림형제단, 교회로 보고, 권위주의 정부와 종교 세력 간 관계 변화를 정권별로 살펴본다. 이집트 정부는 1950년대 나세르 정부부터 2020년 현재까지 공화정 형태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2011 ‘아랍의 봄’ 이후 몇 년간 예외는 있었으나 주로 군부 출신의 세속주의, 권위주의 지도자의 장기 독재를 그 특성으로 한다.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이슬람주의 세력)과 교회(기독교 사회)와 때에 따라 대립 또는 협력 관계를 형성했고, 이는 사회 불안정 또는 통합에 영향을 끼쳤다. 이 연구는 이집트에는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기독교 집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이집트 정치 연구가 대부분 정부-무슬림형제단 간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교회를 또 다른 주요 정치 행위자로 고려했을 때 이집트 사회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글은 ‘세속주의 정부 대 이슬람’이라는 이원적인 틀을 해체하고 종교 세력을 다원화함으로써 비아랍사회에서 아랍세계에 대해 제기해왔던 ‘이슬람 예외주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하현정 (Duke Kunshan University)
이집트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정치는 각국의 역사, 정치, 사회적 동학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형성, 발전해왔다. 이 지역의 정치 상황은 특히 근대 이후 식민과 탈식민의 경험, 시민사회의 역동, 중동 지역 내 갈등 – 예컨대 이스라엘 건국과 이를 둘러싼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 등, 나아가 각 국가가 맺는 서방과의 관계 등에 의해 부침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끊임없는 정치·사회 영역의 변화는 일반 국민의 삶에 깊이 관여했고, 때로는 2011 ‘아랍의 봄’이 그러했듯 그들이 사회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정치적 역동성이나 사회 변동보다는 많은 경우 ‘변하지 않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지젝(2015)이 지적했듯, 이슬람주의는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이슬람주의는 모더니티가 야기하는 세속화 또는 서구화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이념이자 이를 바탕으로 하는 운동이며,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같은 경우 반식민 저항의 일환으로 태동하기도 하였다. 이슬람주의는 국내외 정치 환경의 변화에 기대어 이들 세력이 부상하거나 쇠퇴하는 하나의 유기적 정치 세력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아랍세계는 이슬람주의가 이 지역에 항상 존재해온 것으로 인식해왔다. 사회학자 엄한진(2011)은 이러한 초역사적 시각을 지적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예외주의’를 경계할 것을 주문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집트에서 정치와 종교 관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오랫동안 이 지역의 정치적 선구자로서 자리매김해왔다. 특히, 이집트는 중동 지역의 뇌관 중 하나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에 있어 아랍 국가들의 입장을 주도·대변하는 역할을 맡아왔기에 이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대표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세속·권위주의 성격의 정부 대 이슬람주의 세력 간 갈등은 정도는 다르나 인근의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뿐만 아니라 레반트 지역의 시리아, 나아가 터키 등에서도 나타나기에, 이집트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이 지역 정치를 비교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이제까지 이집트 정치 지형을 논하는 연구는 주로 근대 이후 정권-무슬림형제단 관계에 집중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최근에는 이집트 내 기독교 공동체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부-교회 간 관계 변화를 역사적으로 분석한 몇몇 연구도 출판되었다. 이집트는 순니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무슬림이 다수자 집단을 구성하지만, 나머지 인구 10%의 대부분이 이집트 정교회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집트는 2020년 2월을 기점으로 전체 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섰는데, 이 중 천만 명 정도가 기독교 인구인 것이다. 이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독교 집단으로 이 지역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집단을 대표하는 교회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정부, 무슬림형제단, 교회라는 세 주요 정치 행위자들을 함께 고려하여, 정치와 종교 세력 간 관계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접근은 이제까지 상대적으로 연구 대상에서 소외된 이집트 교회를 분석의 중심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집트 정치 지형을 보다 입체적이고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아가 정권별로 이 세 행위자의 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정권이나 이들 행위자 간 관계 변화가 이집트 사회 내 이슬람주의 세력의 확산 혹은 종파주의 특성의 변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무슬림형제단–교회’의 정치 역학
이집트의 주요 정치 행위자로 정부, 무슬림형제단, 교회를 들 수 있다. 이집트는 오랜 기간 군주제하에 있다가 근대에 영국 식민 통치(1882-1922)를 겪은 후 30여 년간의 왕정(1922-1952)을 거쳤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자유장교단과 함께 군부 쿠데타를 통해 왕정을 폐하고 공화정을 선포한 이후, 이집트는 2020년 현재까지 공화정을 유지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이후 몇 년간 예외는 있었지만, 이제까지 이집트 정권은 대부분 세속주의와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장기 독재, 카리스마 리더십을 특성으로 한다. 이집트의 장기 독재 정치는 가말 압델 나세르(1956-1970), 안와르 사다트(1970-1981), 호스니 무바라크(1981-2011)까지 50년 이상 지속했으나 2011년 대규모 민중시위로 인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집트 군부 세력은 막강하여, 2012년,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무슬림형제단 출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를 집권 1년 만에 하야시키고, 군부 출신인 압둘 파타흐 엘-시시(2014-현재)에 의해 장기 독재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의 권위주의 정권은 시대의 배경과 과제에 따라 주요 정책이 변화하였는데, 예컨대 나세르 정부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1950년대에도 지속했던 영국의 내정 간섭을 종료하고,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정책 수립에 집중했다. 반면, 사다트는 경제 개방정책과 이스라엘과 평화 관계 수립을 중요시했고, 이어 무바라크는 경제 회복과 이슬람주의 세력 부상에 대한 대응에 집중했다. 2011 ‘아랍의 봄’ 이후 첫 권위주의 정부로 등장한 시시 정권은 이슬람주의 세력을 포함한 다양한 반정부 집단에 대한 탄압과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등에 주력하고 있다. 이렇듯 이 정권들은 시대에 따라 탈식민과 아랍민족주의를 통한 사회통합, 이슬람주의 세력의 부상에 대한 탄압, 그리고 무슬림-기독교인 간 종파주의 갈등의 심화 등 다양한 과제를 다루어야 했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이슬람주의 세력은 무슬림형제단으로, 1928년 하산 알 반나 (Hassan al-Bannah)가 영국에 대한 반식민 투쟁을 위해 설립하였다. 이들은 군주제하에서 와프드 당 내각이 친영 성격이 강한 왕의 독재를 통제하지 못한 데다 경제 상황 또한 어려워지자 영국을 이집트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이슬람을 국가 통치의 기반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무슬림형제단의 이념은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대도시의 대학생들 중에서 사회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지역 출신 엘리트 등을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무슬림형제단은 또한 정부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지역에서 활발한 사회복지 활동을 벌였는데, 주로 남부 이집트 지역에서 빈곤층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식료품과 생활용품 등을 무상으로 지급하면서 국가의 지원에서 소외당한 계층을 지원했다(Wickham 2013). 무슬림형제단은 이 외에도 다수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이를 경제적 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지도자들이 대거 해외로 망명하면서 이집트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지에 지부를 둔 초국가적인 단체로 성장했다(송경근 2009).
정부와 무슬림형제단에 더해 이집트의 또 다른 주요 정치 행위자는 교회이다. 콥틱 정교회(Coptic Orthodox Christianity)라고도 불리는 이집트 교회는 AD 42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세워졌고, 지금까지 기독교 사회의 대표자로 자리 잡고 있다. 1950년대 공화정 체제하에서 이집트 교회의 교황은 키롤로스 6세(1959-1971), 셰누다 3세(1971-2012), 그리고 현재 타와드로스 2세(2012-현재)로 이어진다. 이들은 해당 시기 정권과 대부분 협력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아래에서 살펴보듯 예외적으로 정권과 갈등의 관계에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이집트 교회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모더니티에 대한 대응으로 정체성 부활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에서 주일학교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여 일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역사와 교리 중심의 교육을 시작했다.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정치 분야 및 문화, 체육계 등 사회 전반에서 인구 대비 낮은 대표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독교인을 ‘소수자’로 명명하는 것을 거부하며,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같이 이집트 사회의 완전한 시민임을 주장해왔다(Elsässer 2014).
가말 압델 나세르(1956-1970):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탄압과 정부–교회 협력 관계 형성
1922년 영국으로부터 유사 독립을 이루어 낸 이집트에서는 푸아드 1세와 그의 아들 파루크 1세로 이어지는 군주제가 도입되었다. 30여 년간 이어진 이 군주제는 자유장교단 출신인 가말 압둘 나세르에 의해 막을 내리고,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나세르는 1952년 공화정을 선포했다. 나세르는 1970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와 포퓰리즘에 입각한 정치에 집중했는데, 탈식민 시기 아랍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나세르는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어느 때보다 국민통합이 필요했던 시기에 이집트 국민은 나세르의 카리스마 리더십을 신임하고 지지했다(Badran 1993).
나세르는 정치, 경제 안정을 위하여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이 중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데, 이를 계기로 서구의 간섭을 종결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1956년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에 대해 국유화를 선언했고, 이에 군사 작전을 시작한 영프 연합군은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을 통해 시나이반도를 점령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군사적으로 패했지만, 국제연합의 개입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1) 그 결과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이루어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나세르는 카리스마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국민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는 이집트 경제에 대한 서구의 개입을 단절하는 경제, 정치적 독립을 의미했다. 이집트로서는 이제는 더 이상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경제 주도권을 잡겠다는 분명한 탈식민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기였다.
나세르는 정권 초기 무슬림형제단과 친화적인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는 그들이 반(反)영 의식과 경제문제에 대한 위기를 공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친화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는 나세르가 점차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이슬람보다는 세속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하자, 무슬림형제단이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이 자신을 목표로 암살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무슬림형제단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송경근 2009).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원들을 체포·구금했고, 1966년 사이드 꾸뜹을 포함한 지도자들과 수백 명의 단원을 처형했는데, 이 시기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심한 탄압을 받았던 시기로 기록된다. 무슬림형제단은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무슬림이 종교적 차이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을 통치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Hasan 2003).
나세르는 당시 정교회의 교황이었던 키롤로스 4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친화적이고 협력적인 국가-교회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 둘은 개인적 친분도 있었고 대외적으로도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일례로 나세르가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크게 패한 것을 이유로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했는데, 이에 대해 교황이 그 결정을 반려하도록 독려한 것을 들 수 있다(Tadros 2009). 이러한 정부-교회 간 관계는 교회가 정부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그에 대한 댓가로 기독교 사회를 이슬람 무장단체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상호 협력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나세르 정권은 교회와 협력 관계를 형성한 것과는 별개로, 토지 개혁을 통해 교회와 기독교인 소유의 토지를 대거 국유화했다. 이는 교회의 경제기반을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더 나아가 기독교 사회의 계층화가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Tadros 2009).
나세르는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정책을 통해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고자 노력했고, 탈식민 근대화와 사회통합 정책 등으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나, 권위주의 정치와 군부 독재를 시작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나세르가 이슬람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교회와 협력 관계를 맺었던 관계는 이후 무바라크와 시시 정부에서도 공통으로 드러난다.
안와르 사다트 (1970-1981): 친무슬림형제단 대 교회 탄압
나세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자신의 정권을 기존의 나세르 정권과 차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세르가 국영화 정책을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적용한 것에 반해, 사다트는 민영화와 시장개방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외국인 투자와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집트의 경제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결과적으로 양극화 심화와 물가상승, 실업률 증가 등 이집트 내 경제문제를 낳았다. 실업률은 나세르 시기인 1960년대 남성과 여성의 실업률이 각각 1.9%, 5.8%를 기록했던 것에 반해, 1976년 사다트 시기에는 각각 7.7%, 29.8%로 급증했다(Hatem 1992:234). 이에 사다트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의 경제 지원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1977년 세계은행에 긴급 차관 요청했다.
사다트는 집권 초기에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무슬림형제단과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자신을 ‘무슬림 대통령’으로 정체화하며 이슬람을 통해 사회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사다트에게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기에 이들 세력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따라서 나세르가 구금했던 무슬림형제단 단원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1971년, 사다트는 이집트 헌법을 개정하며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입법의 근거로 규정했고, 1979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2조를 개정하며 “이슬람이 국가의 종교이며, 아랍어는 공식 언어이자 이슬람법이 입법의 주요 근거”임을 천명했다. 이 조항은 이듬해, 샤리아가 ‘유일한’ 입법의 근거라고 보강·수정되었다(Aly and Wenner 1982). 무슬림형제단은 사다트의 친 무슬림형제단 정책으로 인해 제도정치 진입이 가능해졌고, 독립적인 정당을 꾸리는 데에는 여전히 제약이 있었으나, 1976년 의회 선거에서 총 여섯 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었다(송경근 2009). 이러한 정부-무슬림형제단 관계는 교회와 이집트 사회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사다트와 교황의 관계는 정권 초기에는 협력 관계로 시작했지만, 사다트의 계속되는 친이슬람주의 행보는 정권-교회 간 협력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1970년대 이슬람주의 세력의 부상은 기독교 사회에 대한 공격과 교회 방화사건의 증가를 초래했다. 이슬람을 강조하는 정부는 기독교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인 셰누다 3세는 사다트의 헌법 개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의 의견이 반영되지는 않았고 이는 오히려 정부-교회 간 갈등이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교회 간 갈등은 이집트가 1978년 이스라엘과 맺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이후 심화했다. 이스라엘은 사다트에 더 많은 이집트 국민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할 것을 요청했는데, 여전히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했던 이집트 무슬림들은 대다수가 이를 거절했다. 사다트는 차선책으로 셰누다 3세에게 교회가 나서서 기독교인들의 이스라엘 관광을 독려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셰누다 3세는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관광으로 인해 이집트 무슬림들에게 민족의 반역자로 몰릴 것을 두려워해 사다트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화가 난 사다트는 1981년 9월, 셰누다 3세에 대한 교황 임명을 철회하고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Hasan 2003). 사다트 정부와 교회 간 마찰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교황은 1985년 무바라크에 의해 가택연금이 해제될 때까지 카이로 밖에 있는 수도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정부-교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부와 이슬람주의 세력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결국 사다트는 1981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8주년 기념식에서 ‘알 지하드’라는 이슬람 급진주의 단체에 의해 암살당하는데, 이 단체는 1970년대 초 무슬림형제단의 온건주의를 비판하며, 무슬림형제단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조직이었다(송경근 2009). 사다트는 재임 기간 동안 친이슬람주의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호스니 무바라크 (1981-2011):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탄압과 국가–교회 간 협력 관계 회복
사다트 사망 이후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 대리직을 수행했고, 이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무바라크는 나세르와 사다트의 유산을 복합적으로 이어간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는 무바라크가 아랍민족주의에 기반을 두면서 경제적으로는 실용주의 중립 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튀니지, 이집트, 알제리 등 다수의 중동 국가들은 국제금융기구의 강요로 대대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정부의 보조금이 대거 삭감되었고, 계층과 지역 간 격차 증대, 청년 실업률 증가, 빈곤 심화 등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이 더욱 악화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집트는 1991년 국제기구경제개혁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관한 협정을 통해 공기업의 민영화를 진행했고, 이로 인해 공공부문의 일자리 수가 대거 줄어들었다(Momani 2018). 그럼에도 무바라크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2000년대 들어서도 지속하였다. 이러한 경제문제는 결국 2011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으로 급속도로 확산했던 반정부 시위의 물결의 주요 원인이 된다.
정권 초기에 무바라크는 집권 초기 사회 안정을 위해 무슬림형제단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무바라크는 무슬림형제단의 정치 활동을 허용하는데, 이 시기 이들 세력은 거대 야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무슬림형제단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는 것에 위협을 느낀 무바라크는 이들의 정치 활동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곧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경제난이 심각해지면서 실업률이 증가했고, 어려움에 맞닥뜨린 젊은 대학 졸업자들은 무바라크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무슬림형제단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변모했다(Wickham 2013).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90년부터 1997년 사이 이슬람 무장단체가 설립되었는데, 특히 ‘알 자마아 알 이슬라미야(Al-Jama’a al-Islamiyya)’와 ‘지하드(Jihad)’는 무슬림형제단의 온건함을 비판하며 강한 반서구 입장을 드러냈다. 알 자마아는 1997년 ‘룩소르 학살’을 감행하여 외국인 관광객과 이집트인을 포함하여 총 68명의 사망자를 냈다(Gerges 2000). 이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을 공격했지만, 이들의 공격 대상은 점차 기독교인으로 바뀌었다. 이 무장단체들은 외부로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협하여 이집트 관광 산업에 타격을 주고, 국내에서는 정부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를 공격함으로써 국내 사회 질서를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바라크 정부는 이 단체의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는 등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정권 초기였던 1985년, 무바라크는 셰누다 3세 교황의 가택연금을 해제하였다. 카이로로 돌아온 교황은 이전 사다트 정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하던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무바라크와 협력 관계를 회복했다(Hasan 2003). 이는 교황 자신이 스스로 입장을 변화하려고 노력한 점도 있겠지만, 동시에 무바라크 정부가 사다트와 달리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이스라엘과 평화 관계 수립에도 덜 열정적이었던 것도 정부-교회 관계 개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주요 원인이었다. 교황은 2005년 무바라크의 다섯 번째 재선에 앞서 그에 대해 공개지지를 선언했고, 기독교인에게 무바라크에 투표할 것을 독려했다(Tadros 2009).
교회는 정부와 관계 회복에는 성공했지만, 이것이 기독교 사회 전체의 평화나 무슬림-기독교인 간 평화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바라크 시기에 이슬람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제도정치에 진출하고, 경제문제로 무바라크 정부에 실망한 젊은 무슬림들이 대거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또한 이슬람 무장세력이 기독교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이집트 사회 내 반기독교 정서는 확산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기독교인이나 교회 건물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마다 이집트 사회 내 종파주의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주의 가해자들을 금치산자로 판단하여 면책하거나 오히려 기독교인만 처벌하는 등 공평하지 않은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은 오히려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를 악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함마드 무르시 (2012-2013): 2011‘아랍의 봄’이후 이슬람주의 정치의 부상과 반기독교 정서 확산
2011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18일 동안 매일 이집트 국민을 광장으로 이끈 것은 30년째 이집트를 통치한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분노와 더 나은 삶을 향한 의지, 그리고 정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집트를 비롯한 다수의 중동 국가들에서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로 인해 야기된 계층 간 격차의 심화와 빈곤, 실업 등의 문제로 국민들이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국민들은 자신의 정치적 자유를 장기간 억압해왔던 독재를 더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2011‘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이 민중 시위 끝에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가 하야 선언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했던 ‘파라오’정권의 종말은 이집트의 민주주의 이양을 약속해주지 못했다.
2011년에 일어난 사건 중 주목할 것은 ‘마스페로 학살(Maspero Massacre)’이다. 이집트 군부(SCAF)가 임시 정부 역할을 맡았던 시기, 이집트 남부의 아스완 지역에서 이집트 정교회의 한 교회 건물에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한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10월 9일, 기독교인들은 마스페로라고 불리는 카이로의 공영방송국 건물 앞에서 정부가 교회를 보호하지 못했음을 규탄하는 연좌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집트 군부가 탱크로 시위자들을 몰아냈고, 이로 인해 백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다치고 20여 명이 사망했다. 이 시기 이집트 군부는 이슬람주의 세력의 부상에 대해 그들의 권위에 위협을 받는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반군부 시위를 벌이자 이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에게 무바라크 뒤에서 그의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던 군부는 기독교인 사회와 친화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오랫동안 믿고 있었던 군부가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사실 때문에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Ha 2017).
2011년에는 이슬람주의와 살라피 세력이 제도정치에 진입하면서 이슬람주의가 부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듬해 2012년 5-6월에 걸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집트 국민은 새로운 선택지가 없는 채 무함마드 무르시(무슬림형제단 출신)와 아흐마드 샤픽(무바라크의 기존 세력이자 군부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후보) 사이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지 갈등했다. 기독교인들은 많은 경우 샤픽을 선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는 2011 민중항쟁의 정신에 반하는 선택을 할 수 없어 무르시를 선택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었다.2) 이 시기 부상한 이슬람주의를 통해 무슬림형제단은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입지를 높였고, 이 열기를 바탕으로 무슬림형제단 소속이었던 무함마드 무르시가 2012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사람들은 무르시 하야를 주장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군부가 이에 가세하여 쿠데타로 무르시 정권은 막을 내렸다.
압델 파타흐 엘–시시 (2014-현재):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탄압, 친화적 국가–교회의 관계
군부 출신이었던 압둘 파타흐 엘-시시가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집트는 다시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 장기집권하는 권위주의 정부 체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2014년 출범한 시시 정부는 민중봉기 이후 두 번째로 선출된 대통령으로, 민중봉기와 무르시 하야를 이끌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 경제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최근에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실업률이 증가했다.
시시는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 무슬림형제단이 설립한 자유정의당을 해산시키는 등 이슬람주의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살라피 정당도 앗-누르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산했다. 상대적으로 교회에 대해서는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2015년 이집트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시가 성탄절 전야와 부활절에 교회 미사에 참석하는 모습을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정부-교회 간 협력 관계는 나세르와 무바라크 정권에서 보였던 협력 구도와 흡사한데,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탄압을 가하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시시는 무바라크와 비교해 더 강압적인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는 시시 정부가 시민사회단체의 운신의 폭을 극도로 제한하고 이로 인해 사회 운동이 침체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3) 시시는 2019년 새로운 비정부기구 법을 도입했는데, 시시는 이 법을 통해 비정부기구가 국가의 안전에 해가 되지 않는 사회복지 활동만 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4)
2012년 셰누다 3세 교황이 선종하고, 그를 이어 타와두로스 2세가 새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셰누다 3세에 비해 정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편이지만, 대체로 정부와 협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시시는 2015년 1월 성탄절 전날 미사에 교회를 방문하여 성탄절을 함께 축하했고, 같은 해에는 부활절에 교회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시시가 시민사회를 더욱 탄압하고,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시시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친화적인 태도는 오히려 시시의 시민사회 탄압에 불만을 가지는 다수의 무슬림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기독교인들에게 향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Ha 2020).
시시는 임기 초반부터 자신의 권력을 장기화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2019년에는 헌법을 수정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연임하는 경우, 두 번째 임기를 6년으로 늘리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개정에 따라 시시가 2024년 연임에 성공할 경우 최장 2030년까지 임기를 연장할 수 있게 된다.5) 시시 정부의 집권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큰 가운데, 정부의 친 교회 접근은 오히려 이집트 사회를 종교에 따라 더욱 분열시킬 우려가 증대하고 있다.
이집트 정치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기대하며
이제까지 1950년대 이집트 공화정 이후 권위주의 정부와 종교 세력 간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집트 정부는 이제까지 비교적 강한 국가의 면모를 보이며 통치를 이어왔다. 이집트에서는 2012-2013 무르시 정권을 제외하고는 장기 독재 정권이 지속해서 이집트 사회를 통치했고, 이 과정에서 경제문제의 심화와 시민사회의 정치적 자유 제한이 주요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권위주의 정부는 종교 세력에 대해 탄압하거나 그들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설립 초기부터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은 정부의 위협이 되는 존재로 부상하면서 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반면 이슬람주의 부상을 경계하는 정부와 교회는 대체로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이 정부-교회 간 협력 관계는 이슬람 무장단체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 이집트 군부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교회 건물이나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원인이 되었고, 특히 1990년대 이후 알자미아 알이슬라미야나 지하드와 같은 무장단체가 결성되면서 이집트 사회 내 반기독교 정서가 확산하며 종파주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 글은 정치적 행위자 간 역학에 중점을 둠으로써, 이집트 정치에서 나타나는 이슬람주의 세력의 개입이 필연적이거나 본래의 특성이 아니라, 정부와 무슬림형제단, 교회 간 간 상호 관계를 통해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이집트의 제도정치의 역할을 이해하고, 어떠한 배경에서 정치 역학이 변화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이집트 정치를 보다 입체적이고 폭넓게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저자소개
하현정(hyunjeong.ha@dukekunshan.edu.cn)은
중국 듀크 쿤산 대학교(Duke Kunshan University)의 사회학 조교수이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 주립대학교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노틀댐 대학 (University of Notre Dame)의 종교와 사회 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Religion and Society)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쳤다. 종교와 권력의 복합적 작용이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고, 이와 관련하여 2011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 변화, 무슬림 여성과 가족법 개정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듀크 쿤산에서는 사회학 이론과 현대사회문제, 중동의 정치와 종교 등을 강의하고 있다.
1) 제2차 중동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수에즈 위기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다음의 온라인 자료를 참고할 것: https://2001-2009.state.gov/r/pa/ho/time/lw/97179.htm.
2) Sedra, Paul. 2013. “The Copts under Morsi: Leave them to the Church” Middle East Institute. May 1. https://www.mei.edu/publications/copts-under-morsi-leave-them-church (검색일: 2020.08.30.)
3) Pennetier, Marine. 2019. Egypt’s rights record seen as worse than under Mubarak: Macron. Reuters. January 28. https://www.reuters.com/article/us-egypt-france/egypts-rights-record-seen-as-worse-than-under-mubarak-macron-idUSKCN1PL0RQ (검색일: 2020.08.30.)
4) Aboulenein, Ahmed. 2017. “Egypt issues NGO law, cracking down on dissent.” May 30. Reuters. https://www.reuters.com/article/us-egypt-rights/egypt-issues-ngo-law-cracking-down-on-dissent-idUSKBN18P1OL (검색일: 2020. 08. 20)
5) Reuters 2020. “Egypt’s Sisi approves ban on retired army officers standing for election.” July 30. Egypt Independent. https://egyptindependent.com/egypts-sisi-approves-ban-on-retired-army-officers-standing-for-election/ (검색일: 2020.08.30.)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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