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건국 71주년을 맞이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분쟁 뿐 아니라 유대인사회 내부의 에스닉 분리 및 갈등 문제와 여전히 씨름 중이다. 시온주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근대화’와 ‘탈아랍화’ 정책을 통해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합하고자 했지만 이민자 출신지에 따른 에스닉 경계와 정체성은 세대를 거쳐 갈수록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출신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유럽식 주류 문화로의 동화 정책은 ‘미즈라히’라는 상상된 공동체의 등장을 초래하였으며, 이후 미즈라히 사이에서 나타난 출신지역에 따른 에스닉 전통의 부흥 현상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에스닉 경계가 문화적 정체성의 양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임안나(서울대학교)
이스라엘의 가려진 얼굴
이스라엘은 유대인디아스포라의 이민에 기반을 두고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된 근대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서남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나 건국 이래 주변 아랍 국가들과 끊이지 않은 전쟁으로 정치·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왔으며, 안으로는 가자지구(Gaza District)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하마스와 대치중이라는 점에서 ‘분쟁국가’로 인식된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은 팔레스타인과의 영토분쟁을 둘러싼 정치 외교적 이슈에 국한되어 왔으며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단일한 운명공동체로 비춰져 왔다. 물론, 동질적이고 응집력 있는 유대민족의 형성은 이스라엘 건국 이래 유럽 출신 유대인 지도층이 추구해 온 목표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회는 세속적/종교적, 좌파/우파[1], 이민자/‘짜바르(이스라엘출생 유대인)’ 등의 구분 뿐 아니라 이민자의 출신지를 기준으로 범주화되는 에스닉 집단의 경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복합 사회이다.
현재 이스라엘 인구 약 900만 명 중 유대인이 대략 74퍼센트, 아랍인이 2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민족(nation)’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를, ‘에스닉(ethnics)’은 유대인의 내부적 구분을 위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2]. 유대인은 본인이나 부와 모, 조부모의 출신지에 따른 계통(descent)’을 가지는데, 예를 들어 북미대륙 출신은 ‘아메리카이(American),’ 예멘 출신은 ‘테마니(Yemenite),’ 모로코 출신은 ‘모로카이(Moroccan)’로, 구 소비에트 연방 출신은 ‘러씻(Russian)’으로 규정된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점차 출신지를 가로지르는 결혼과 짜바르의 증가로 경계가 약화되기는 했지만 현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출신지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에스닉 정체성은 유대인 민족정체성, 이스라엘 국민 정체성과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계통에 따른 에스닉 구분은 다시 아슈케나지(Ashkenazi)와 미즈라히(Mizrahi)의 이분법적 범주로 분류되어 왔다. ‘아슈케나지’는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 유럽 전역에 이산되어 있던 유대인과 그 후손을, ‘미즈라히’는 동양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북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이주한 유대인과 그 후손을 통칭한다.
텔아비브는 1909년 고대 항구 도시 야포(Old Jaffa)[3]의 북쪽으로 유대인 이민자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근대 도시로, ‘유럽’과 ‘아시아’가 뒤섞인 혼종적 공간이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가장 현대적이고 유럽적인 도시이자 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아랍인의 도시’였던 야포 역시 건국 직후 텔아비브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2003년에 유네스코는 텔아비브의 로스칠드 거리(Rothschild Street)를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유럽식 근대 건축물을 세계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The White City of Tel Aviv’라는 브랜드 명칭을 만들어 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럽에서 온 유대인이민자가 정착하면서 세운 이 건물들은 발코니, 평평한 지붕, 스타코 장식의 흰 벽과 정돈된 직선 라인이 특징인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다. 유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보이는 이 도시 공간은 이스라엘 건국과 유대인 이민의 발자취를 품고 있는 역사적 장소로서 홍보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축가 샤론 로트바드(Sharon Rotbard)는 2005년에 출판한 책 White City, Black City: Architecture and War in Tel Aviv and Jaffa를 통해 유럽 식민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화이트시티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유럽식 근대 건축물은 텔아비브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건축양식 중 일부일 뿐이며, 텔아비브를 화이트시티로 규정하려는 노력에 의해 그 외 구역은 ‘블랙시티’로 감춰져 왔다는 것이다. 야포와 더불어 화이트 시티 담론에 의해 잊혀진 블랙시티의 대표적인 사례가 케렘하테마님(Kerem HaTemanim)이다. ‘예멘인의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케렘하테마님은 1906년 예멘에서 이주한 유대인이 정착하면서 생겨난 소규모 주거지역이다. 예멘식의 낡고 아담한 건물들이 분포해 있는 이곳은 ‘유대인의 도시’ 텔아비브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장소 중 하나이지만 화이트시티에 가려진 채 독특한 예멘음식점과 예멘유대인 집거지로만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젠트리피케이션 마저 겪기 시작했다. 텔아비브의 지리정치학적 경관이 암시하듯, 현대 이스라엘에서 미즈라힘(‘미즈라히’의 복수형)의 이야기는 도시 공간에서도, 교과서에서도 ‘이스라엘의 역사’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유대인디아스포라의 이민과 시온주의 국가건설
이스라엘 건국 전 이미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고 있던 아랍인과 드루즈, 그리고 소수의 유대인을 제외하면 현재 이스라엘 내 유대인 인구는 건국 직후 이주해 왔거나 이스라엘에서 출생한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2015년 기준으로 이스라엘 유대인 인구의 75퍼센트 이상은 이스라엘 출생자인 짜바르로 구성된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오스만 통치기였던 1882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영국위임통치기(1920-1948)에 급격히 증가했다. 당시 시온주의적(Zionism) 이상을 가지고 식민지 팔레스타인으로 온 유럽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임시정부인 ‘이슈브’를 구성함으로써 건국 이후 이스라엘에서 지속적으로 정치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이들이 추진했던 시온주의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시온’, 즉 당시 팔레스타인 땅을 타국에서 떠돌며 살아온 모든 유대인디아스포라가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상정하고 새로운 유대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적 운동이었다(Cohen et al., 2019).[4]
이러한 시각은 건국 직후 이스라엘 정부가 제정한 귀환법(Law of Return 1950)에 반영되어 있다. 귀환법은 유대인에게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유대인은 유대혈통인 모의 자녀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자로 규정되지만 1970년 개정법은 유대인의 자녀와 손자녀, 그리고 그 배우자로 적용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 결과 이스라엘 인구는 1950년에 137만 명에서 1998년 말에는 486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19년 현재 900만을 돌파했다. 특히 건국 직후인 1948년에서 1956년 사이는 대량 이민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로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서 유입된 이민자가 45만 명, 유럽과 미국에서 온 이민자가 36만 명에 달했다(Swirski, 1989: 4).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는 에티오피아와 구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각기 8만 여명과 백만 여명의 이민자가 유입되면서 이스라엘의 인구 구성은 더욱 다양해졌다.
표1.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이민 흐름(1882-1991)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오랜 시간 분리되어 각기 거주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초기 정부의 목표는 용광로 정책(‘Integration of the Exiles’)을 통해 이질적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합시켜 하나의 ‘이스라엘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아랍 지역 출신 이민자는 이스라엘 정부가 추진하는 민족 통합 정책에서 동화의 주요한 대상이었다. 이러한 동화 정책의 모델은 유럽 아슈케나지 문화와 근대적 시스템이었으며, 이스라엘 영토 내에 아랍인이 남겨 놓은 흔적과 이슬람 세계에서 살았던 유대인 이민자들이 가져온 아랍문화는 유대정체성에 위협으로 여겨져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전역의 아랍식 지명을 히브리어 지명으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팔레스타인 마을에 유대인정착촌을 세움으로서 이스라엘 영토의 유대화(Judaization)와 탈아랍화(De-Arabization)를 동시에 추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56년에는 급증하는 인구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모든 이스라엘 시민에 성과 이름을 부여하는 성명법(The Names Law)이 제정됨으로써 히브리식 개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아랍 지역 출신 이민자들은 아랍어에서 거리를 둘 것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도 기존의 아랍어 성을 히브리어 성으로 개명해야 했다. 예를 들어, 아랍식 성인 Hamdi는 히브리식의 Hemed로 개명되었다. 예멘 유대인의 경우 대부분 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멘에서 살았던 마을의 지명이나 예멘에서 가졌던 직업으로 새로운 성을 만들었다.[5] 또한 1950, 60년대에 물물거래는 정부가 지정한 협동조합을 통해서만 허용되었지만 아슈케나지 문화보다 아랍 문화에 더 익숙했던 예멘 출신 이민자들은 아랍인 이웃과 블랙마켓을 형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더욱 철저하게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예멘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로서 오랫동안 유지해 온 문화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와 개명은 각각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과거로부터의 물리적, 상징적 단절을 의미했다.
동화정책의 명암: 아슈케나지와 미즈라히
이스라엘 건국 전에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의 수는 75만에서 85만 사이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서 유대인은 이류시민인 디미(dhimmi)의 지위를 가지고 살았지만 거주국 사회에서 철저히 분리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5세기 중반부터 시아파 무슬림 국가 예멘에 정착했던 유대인은 예멘사회에서 ‘불결한’ 직업으로 여겨지는 금속공예, 목공, 직조, 행상에 종사하면서 예멘사회의 일부로 분절 통합되어 있었다(Katzir, 1982). 하지만 영국 통치기에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 유럽 유대인에 의해 시작된 시온주의 운동이 아랍 민족주의와 반유대 정서를 자극하게 되면서 예멘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멘 유대인은 시온주의적 아슈케나지에 의해 19세기 말부터 아랍인을 대체할 노동력으로서 이스라엘로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절정에 이른 이스라엘 건국 직후 가장 많은 수가 이주했다. 1948년 말부터 1949년 3월 사이에만 7천 명의 예멘 유대인(아덴 포함)이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1949년 말에 3만 명, 1951년에는 ‘마법의 양탄자 작전(Operation Magic Carpet)’을 통해 만 여 명이 비행기로 수송되었다.
미즈라힘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 개념이다. 이스라엘의 이민자 통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 출신 이민자와 그 자녀들은 아슈케나지와 구별되는 ‘미즈라히’로 범주화되고 ‘야만적인 동양’으로 묘사되면서 이스라엘의 내부적 타자가 되었다(Shafir and Peled, 2002: 75). 건국 초기의 ‘식민주의적 인종주의’를 발판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슈케나지는 이스라엘의 주류 사회를 대표하는 집단으로, 미즈라히는 아슈케나지 주류 문화로 동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미즈라히는 아슈케나지에게는 사용되지 않는 ‘에스닉’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등 특수한 존재로 규정되었다.[6] 특히 가장 이질적인 집단으로 여겨진 예멘 유대인들은 동화정책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1951년 크네셋(국회) 회의에서 벤구리온(Ben-Gurion) 수상은 “정부의 목표는 예맨 이민자들이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어버릴 정도로 이스라엘리로서의 가치를 심어주는 것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Ducker, 2006).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 미즈라히 이민자 역시 문화 충격을 경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64년 아카데미시상식에 이름을 올린 이스라엘 영화 ‘쌀라 샤바티(Sallah Shabati)’는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스라엘로 이민 온 가부장적인 대가족의 가장 쌀라와 그 가족의 정착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놓인 ‘다혈질 중동 출신 이민자’의 좌충우돌 경험과 그가 처한 열악한 상황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숫자에 익숙하지 않은 쌀라는 나이와 가족의 수를 묻는 조사원에게 그저 ‘많이’, 언제 결혼했냐는 질문에는 ‘오래전’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영화에서 아슈케나지 남성은 부유하고 거만한 캐릭터로, 미즈라히 남성은 가난하고 세상물정에 밝은 마초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러한 미즈라히 스테레오타입은 미즈라히가 아슈케나지와 동등한 수준으로 시온주의의 실현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만들어내며 ‘자원 분배’ 측면에서 미즈라히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이스라엘 영토의 유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미즈라히 이민자는 최전방 국경 지역으로 분산, 수용되었으며, 시온주의 국가 건설 작업에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대체할 저렴한 노동력으로서 동원되었다. 영화 ‘쌀라 샤바티’에서 쌀라는 허름하고 작은 오두막집으로 보내진 뒤 임시 숙소라는 말에 대가족을 이끌고 가서 짐을 풀지만 몇 년을 기다려도 다른 아슈케나지 이민자처럼 ‘집 같은 집’을 제공받지 못한다. 아슈케나지가 도시 중심부나 키부츠[7]로 보내졌던 반면, 미즈라히는 주로 임시캠프(ma’abarot)를 거쳐 남부의 네게브나 북부의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 모샤브로 보내졌다. 이러한 인구분산정책은 출신지에 따른 집단거주지를 형성시킴으로써 아슈케나지와 미즈라히의 종족계급적 위계를 공간적으로 구조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된다.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 흐름의 변화 속에서 이스라엘의 중심부와 주변부, 아슈케나지와 미즈라히 사이의 분리와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져만 갔다.
‘상상된 공동체’, 미즈라힘
1995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에 이민 1세대가 이스라엘 내 전체 유대인 인구의 40%를, 2세대가 25%를 차지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 출생한 유대인들의 입국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출생 세대인 짜바르의 증가와 각기 다른 출신 배경을 가진 이민자 1세 또는 2, 3세들 간의 결혼으로 인해 종족성의 구분이 어느 정도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세대를 거쳐 갈수록 약화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종족 집단 간 경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슈케나지-미즈라히는 공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통계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과 아메리카’를 구분의 기준으로 이스라엘 인구통계를 작성함으로써 미즈라히-아슈케나지 범주를 본질화시키는데 기여했다. 1980년대 이후 정부 고위직과 학계에 진출한 미즈라히의 수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아슈케나지와 미즈라히 사이의 사회, 경제적 간극은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무엇보다, 미즈라히와 아슈케나지 사이의 불평등과 미즈라히에 대한 차별은 이민 1세대보다 2, 3세 사이에서 더욱 크게 인식되었다.
세대가 바뀌어도 지속되는 미즈라히의 사회, 경제적 주변화와 아슈케나지와의 불평등한 관계는 에스닉 집단들을 미즈라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하면서 미즈라힘 범주를 내면화하게 만들었다. 미즈라히로서 첫 정치적 대응은 1959년 이스라엘 북부 도시 하이파의 와디 살리브(Wadi Salib neighborhood)에서 미즈라힘 이민자 2세에 의해 일어났다. 이 항쟁은 만취한 모로코 유대인이 경찰에 저항하면서 총기가 난사된 사건에서 촉발되었지만 미즈라히에 대한 오랜 차별에 대한 불만이 그 원인이었다. 이 항쟁은 폴란드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이 깨끗하고 안락한 주택을 제공받는데 비해 미즈라히 이민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주택에 ‘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미즈라히 청년들이 주도한 거리항쟁이었다.
와디 살리브 운동에 이어 1967년 전쟁 후인 1971년에는 예루살렘의 무스라라(Musrara neighborhood)에서 블랙 팬더스(Mizrahi Black Panthers) 운동이 반시온주의 운동의 양상을 띠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와디 살리브 운동과 마찬가지로 미즈라히 2세들에 의해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이 운동은 미즈라히에 대한 차별의 종식과 아슈케나지와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등 이스라엘 시민으로서의 권리 확보에 초점을 두었다. 1973년 일어난 중동전쟁의 여파로 기대했던 성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블랙 팬더스 운동은 사회적으로 침묵되어 온 유대인사회 내부의 차별과 불평등한 관계를 처음으로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내냄으로써 미즈라히 공동체 의식을 고조시켰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또한 아랍계 이스라엘인의 사회적 평등을 위해 연대 투쟁했던 유일한 사회 운동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포스트식민주의 학자들은 시온주의 담론이 유럽/동양, 우월한 아슈케나지 유대인/열등한 미즈라히 유대인이라는 허구적 구분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Hever and Shenhav, 2002). 유럽인의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해 온 유럽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출신 유대인에게 내부적 오리엔탈리즘을 적용함으로써 이들을 ‘미즈라힘’으로 타자화해 왔다는 것이다. 미즈라히 2세들이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기 위해 연합했던 블랙 팬더스 운동은 이스라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 운동이 일어나고 몇 년 뒤인 1977년, 대부분 노동자계급이었던 미즈라히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우파 리쿠드당의 승리로 미즈라히는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미즈라히 지식인과 예술가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운동연대 Mizrahi Democratic Rainbow는 미즈라히에 대한 차별의 역사에 침묵하는 학계를 비판하고 미즈라히 정체성에 아랍 문화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는 블랙 팬더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의 부활과 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에스니시티
1970년대 말 미즈라히가 하나의 집단으로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에 힘입어 아슈케나지 주류 문화에 대한 대항으로 미즈라히 문화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대 정체성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져 온 아랍 지역 출신 유대인들의 문화는 새로운 형태를 띤 채 이스라엘 문화의 일부로 점차 통합되어 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오리엔탈 뮤직’이라고도 불리는 ‘미즈라히 뮤직(muzika mizrahit)’의 유행이다. 미즈라히 뮤직은 미즈라히 가수가 부르는 아랍식과 유럽식 스타일이 혼합된 장르의 음악으로, 전형적인 아랍 음악의 특징인 ‘실슬(silsul)’, 즉 꺾기와 바이브레이션이 두드러진다. 1990년대 이후로는 전자베이스와 기타 등의 현대 서양 악기로 연주되는 등, 락(rock)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음악과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만 하더라도 미즈라히 뮤직은 결혼식, 바르미쯔바(성인식)를 비롯한 종교적 절기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출신 유대인들만 즐기는 ‘에스닉 음악’으로 취급되었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대중음악으로서 자리 잡았다.[8]
2014년 이스라엘 정부는 11월 30일을 아랍 지역과 이란에서 박해를 피해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미즈라히 유대인의 역사를 기념하는 ‘미즈라히 문화유산의 날(Mizrahi Heritage Day)’로 제정했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문화와 역사를 학교 커리큘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의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즈라히는 ‘아슈케나지화(Ashkenazification)’ 되는 대신 음악, 음식, 예술, 문학, 관습 등 여러 영역에 걸쳐서 새로운 이스라엘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과 그 후손을 ‘미즈라히’ 또는 ‘아랍 유대인’으로 범주화하는 것은 이들을 공통의 정체성과 문화를 가진 동질적인 집단으로 본질화시키는 오류를 지속시킬 수 있다. 미즈라히 정체성은 사회경제적으로 주변화된 미즈라히 집단이 아슈케나지와 동등한 권리와 성원권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미즈라히는 출신지에 따른 에스닉 정체성과 문화를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여 연대한 집합체에 가깝다.
세대를 거쳐 갈수록 소멸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에스닉 경계는 문화적인 정체성의 강조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 모로코 유대인의 축제인 ‘미무나(mimouna)’는 이스라엘 주류 문화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에스닉 문화의 사례이기도 하다. 미무나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 끝나는 날 저녁부터 24시간 열리는 행사로, 모로코에서 유월절 기간에 유대인에게 금기되었던 음식인 하메쯔(hametz), 즉 누룩이 들어간 빵, 우유, 버터, 달걀, 꿀 등을 아랍 이웃들이 가져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동참했던 ‘환대’의 축제이다. 모로코에서 미무나는 현재 이스라엘에서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의례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이민자들이 섞여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모로카이’로서의 에스닉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해 왔다. 이스라엘에서 미무나는 이제 에스닉 마이너리티의 전통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치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스라엘의 축제 문화로 자리 잡았다. 또한 모로코는 이집트, 요르단과 더불어 이스라엘과 비자 협정을 맺은 몇 안 되는 아랍 국가로서 최근 이스라엘의 모로코 유대인 사이에서는 ‘문화적 뿌리’를 찾기 위해 카사블랑카의 유대인거주구역인 멜라(mellah)와 유대인박물관 등을 방문하는 문화유산 투어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예멘 유대인은 미즈라히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에스닉 문화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사례이지만 이들은 ‘예멘 히브리어’가 고대 히브리어의 문법에 가장 가깝다는 점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예메니’로서의 강한 에스닉 정체성을 표출하는 집단이다. 예멘 유대인은 평행사촌혼, 혼인의례, 가부장적인 확대가족, 예멘 아랍어의 영향을 받은 엑센트, 음식 등 예멘 현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왔다. 이러한 문화는 이스라엘 정부의 용광로 정책 하에서 억압되어 왔지만 1970년대 말 이후로 나타난 ‘미즈라히 문화의 부흥’이라는 흐름 속에서 자랑스러운 예멘 유대인의 전통으로서 유지되어 오고 있다. 특히 예멘 음식점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케렘하테마님에는 현재는 다소 축소되었지만 자크눈, 비프 수프 같은 예멘 유대인의 전통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결혼식에 앞서 행해지는 혼인의식인 ‘히나(henna)’와 화려한 예복 및 장신구는 현재 이스라엘 사회에서 예멘 유대인의 에스닉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전통적 요소 중 하나로 젊은 층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예멘 유대인으로서의 에스닉 정체성을 시나고그, 아카이브나 박물관, 아트 갤러리의 운영을 통해 재생산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텔아비브와 네탄야, 르호보트 등 예멘 유대인 인구수가 많은 여러 도시에서는 예멘 유대인 박물관과 문화 센터가 개관되고 있다. 2017년에 텔아비브 근교의 소도시 르호보트에 개관된 ‘이스라엘 예멘유대인 문화유산센터’는 예멘에서 유대인이 사용했던 의복과 장신구 전시뿐 아니라 예멘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교육 세미나를 열고 문헌 및 사진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예멘 유대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 모임과 학술대회가 이스라엘과 미국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예멘 유대인의 뿌리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주류 문화와 역사는 아슈케나지의 문화이자 역사였지만 아슈케나지 엘리트 지도층에 의해 낙인화되고 배제되었던 미즈라히 이민자의 문화는 세대를 거치면서 점차 부흥하여 이스라엘의 문화적 다양성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통합은 실패했는가?
이스라엘은 비교적 단기간에 다양한 이민자를 수용하여 국가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 이후 71년이 지난 현재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뿐 아니라 유대인 사회의 내부적 분리 문제로 여전히 씨름 중이다. 건국 전후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이민이 지속되어 온 가운데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 사이 에티오피아와 구 소비에트 연방 출신 이민자의 유입으로 이스라엘의 인구 구성은 더욱 다양해졌다. 이들은 귀환법에 의거하여 유대인의 후손이나 친인척으로서 이스라엘 입국이 허용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종교 기관은 이들을 ‘진짜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특히 많은 구 소비에트 연방 출신 이민자들은 유대교 개종의 압박을 거부하면서도 새로운 이민자로서 ‘사회적 개종’을 겪으며 이스라엘 사회에 수용되고 있다.
현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교육수준, 직업, 소득, 주거지의 측면에서 아슈케나지와 미즈라히 사이에 간극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확산되어 있다. 정치인들은 미즈라히의 표를 의식하여 이스라엘 역사교과서 커리큘럼에 미즈라히 역사를 포함시키겠다는 내용의 공약을 끊임없이 내걸고 있지만 이것은 쉽게 실현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4월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총선 결과 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의 벤야민 네탄야후가 총리로 당선되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첫 총리를 지낸 뒤 2009년에 다시 총리직에 오른 그는 2013년과 2015년에 이어 2019년 총선에서 재당선되었다.[9] 네탄야후는 임기 내내 뇌물수수 등 비리 혐의와 미즈라히와 관련된 ‘인종주의적’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지만 많은 미즈라히 유권자들은 유대인사회의 에스닉 불평등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 정체성과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네탄야후를 여전히 선택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래 추진되었던 용광로 정책에 의해 미즈라히의 주류 사회 통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건국 지도층이 원했던 ‘동질적인 유대인 만들기’의 국가 전략은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건국 이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 이민자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이스라엘은 상당히 다문화적인 사회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출신지에 따른 에스닉 분화와 경계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 정부가 추진한 아슈케나지 중심의 차별적인 용광로 정책과 인구분산정책이 오히려 미즈라히의 집단화를 유도하고 에스닉 경계의 재생산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이스라엘 국민이자 유대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하위 범주로서 자신들의 문화적 에스니시티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통합이라는 목표가 완전히 실패했다고도 성공했다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저자소개
임안나(anna5@snu.ac.kr)는
현재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스라엘의 노동이주와 시민권, 예멘 유대인과 에스니시티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으로 ‘이스라엘의 필리핀 미등록이주여성의 가족과 사회관계’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Networked Mobility in the ‘Migration Industry’: Focusing on the Case of Filipino Elderly Caregivers’ Move to Israel (2015), ‘주말아파트’와 공동체: 이스라엘 내 필리핀 노인 돌봄 노동자의 이주 공간 형성에 관한 연구(2016), 초국적 노동이주와 이주 인프라의 형성 (2018) 등이 있다.
[1]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좌파와 우파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적 관계를 추구하는지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2] 아랍인의 경우 시민권 기준으로 팔레스타인인이나 이스라엘인으로, 종교를 기준으로 무슬림과 기독교도로 구분된다. 이스라엘 국민 신분증에는 ‘민족(לאום)’ 항목에 유대인, 아랍인, 드루즈, 체르케스 등이 명시되어야 했으나 2005년 이후 이 항목이 사라지고 ‘체류상태(시민, 영주권자, 임시체류자)’로 대체되었다.
[3]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인 야포는 한국어 성경(요나 1장 1절)에서 ‘욥바’로 표기된다.
[4]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이민은 ‘성지로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이민(immigration)보다는 ‘알리야(aliya)’로 불리며, 이스라엘을 떠나 다른 곳으로 재이주하는 경우 ‘성지에서 내려간다’는 의미에서 ‘예리다(yerida)’로 불린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유대인을 ‘올레(oleh)’라고 일컫는다.
[5] 예를 들면, 예멘에서 목수였던 이민자는 히브리어로 목수를 의미하는 ‘나가르’를 성으로 만들었다.
[6] 건국 초기 미즈라히는 ‘에돗 하미즈라흐(Edot HaMizrah)’로 불렸다. 에돗의 단수형 ’에다‘는 공동체, 모임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에스닉 집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7]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적 집단거주공동체로 원래 농업공동체에서 출발했으나 목축업과 공업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한다. 주로 아슈케나지 이민자들이 거주한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모샤브는 조합원이 각자 땅과 재산을 소유하고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는 협동농업 마을(cooperative farms)로 미즈라히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구성한다.
[8] 대표적인 가수로는 Ofra Haza와 Zohar Argov, Eyal Golan(예멘), Miki Gabrielov(터키), Shlomi Shabbat, Eti Ankri(튀니지), Kobi Oz(모로코), Ehud Banai(페르시아) 등이 있다.
[9] 2019년 총선에서 당선된 네탄야후가 연정 수립에 실패함으로써 오는 9월 재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Cohen, Y., N. Lewin-Epstein, A. Lazarus. 2019. “Mizrahi-Ashkenazi educational gaps in the third generation”, Research in Social Stratification and Mobility 59, 25-33.
- Ducker, C. L. 2006. Jews, Arabs and Arab Jews: The politics of identity and reproduction in Israel. ISS Working Paper Series/General Series, no. 421, 1-58.
- Hannan H., Y. Shenhav, and Pnina M. 2002. Mizrahim in Israel: A critical observation into Israel’s ethnicity. The Van Leer Jerusalem Institute and Hakibbutz Hameuchad (Hebrew).
- Katzir, Y. 1982. Preservation of Jewish ethnic identity in Yemen: Segregation and integration as boundary maintenance mechanisms,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24(2), 264-279.
- Rotbard, S. (2015). White city, black city: Architecture and War in Tel Aviv and Jaffa. The MIT Press(2005년 히브리어 버전에서 영어로 번역됨).
- Shafir, G. and Y. Peled 2002. Being Israeli: The dynamics of multiple citizenship. Cambridge University Press.
- Swirski, S. 1989. Israel: The Oriental Majority. London: Zed Books.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