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동맹 4개국으로 이루어진 반 카타르 전선은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의 비호에 대한 항의조치로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하였으며, 이는 아랍의 봄 이후 한층 긴장이 고조된 중동 지역에 또 다른 위기감을 불러왔다. 카타르와 외교적 위기의 본질에는 무슬림 형제단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무슬림 형제단과의 분명한 연관성에 대하여 꾸준히 우려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는 알자지라 플랫폼을 이용하여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며 상호 이익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양측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옥정(단국대학교)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동맹 4개국은 2017년 6월 5일 카타르와 외교관계 단절을 선언했다.[1] 카타르와의 단교 사태는 아랍의 봄 이후 한층 긴장이 고조된 중동 지역에 또 다른 위기감을 불러왔다. 사우디 동맹 4개국으로 이루어진 반 카타르 전선은 카타르의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 비호에 대한 항의조치로써 단교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사우디 동맹국들은 단교 선언 직후 카타르와 연계된 테러 혐의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그 목록에는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동 계열의 단체들 및 관련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동맹국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오랫동안 카타르를 무슬림 형제단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인식해왔으며 이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아델 알 주베이르(Adel al-Jubeir) 사우디 외무 장관은 단교 선언 직후 “카타르는 하마스와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판단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듯 카타르와의 외교적 위기의 본질에는 무슬림 형제단이 있다(Negri, 2018). 이러한 맥락에서 카타르 단교사태에 대한 이해와 사태 해결 가능성 및 시점 등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무엇이며, 왜 사우디아라비아는 양측의 관계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지, 과연 카타르는 무슬림 형제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선행조치가 요구된다.
무슬림 형제단은 무엇인가?
무슬림 형제단(The Muslim Brotherhood)은 이집트 항구 도시 이스마일리야(Ismailia) 출신의 교사였던 하산 알 반나(Hassan al-Banna, 1906-1949)가 1928년 설립한 이슬람 단체이다. 하산 알 반나는 저소득층을 핵심 지원 기반으로 한 자선 및 사회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도덕적 가치를 고양하고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보편적 이슬람 체계 위에 국가를 세우는 이상적 비전을 추구했다. 이집트가 처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초창기 무슬림 형제단은 영국의 이집트 지배에 대한 항거에 적극 관여했고, 이집트 군주제를 반대하는 자유 장교단 운동에 협력하며 점차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렇지만 1930-40년대 종교적 기반 위에서 사회, 경제적 복지 혜택을 지원함으로써 이집트 국민들이 느끼는 정치적, 경제적 좌절감을 극복하도록 돕는 그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국가 시스템에 대한 저항성을 가졌다. 세속적인 사회주의 모델을 선호하는 자유 장교단의 가말 압둘 나세르(Gamal Abdul Nasser, 집권 1956-1970)는 1952년 혁명 성공 이후 점차 이슬람 통치 국가를 주장하는 무슬림 형제단과 이견을 드러냈다. 결국 195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행된 나세르의 암살 시도 배후로 무슬림 형제단이 지목되며 그들의 활동은 완전히 위축되었다. 1956년 나세르 정권의 억압은 무슬림 형제단의 이데올로기에 중요한 변화를 촉발시켰다. 이 변화를 불러온 주도적 인물은 바로 사이드 꾸뜹(Sayed Qutb, 1906-1966)이다. 서구와 부패한 아랍 정권 모두에 대한 무장 투쟁을 주장한 사이드 꾸뜹의 사상은 수감 중 집필한 ‘이정표(Ma’alim fi al-Tariq, Milestones)’에서 구체화되었다. 나세르 암살 계획의 주동자로 유죄판결을 받고 1966년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의 지하드 사상은 무슬림 형제단에서 파생된 여러 극단주의 단체들의 폭력적 수단을 이념화하는데 이용되었다(Ehteshami, 2017).
이후로도 지속된 억압 하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세속적 정치 세력들과 조화를 추구하며 생존해왔고, 결과적으로 2012년 대선에서는 무함마드 무르시(Mohamed Morsi)를 이집트 최초의 민주적 선출직 지도자로 배출하기도 하였다.[2] 이집트 이외에도 다수의 아랍 국가에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을 받은 많은 단체들이 존재한다. 튀니지 엔나흐다(Ennahda)당, 요르단의 이슬람 행동전선(The Islamic Action Front), 쿠웨이트의 이슬람 헌법 운동(Islamic Constitutional Movement), 바레인의 민바르(Al Minbar) 등이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이슬람 율법과 도덕에 의해 지배받는 이상적 사회의 구현이라는 하산 알 반나의 초기 설립 이념을 수용하고 각국 내에서 정치적 참여와 협력을 촉구하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좀 더 실용적인 사상을 수용한다. 그렇지만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는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하였으며, 이들을 지원하는 카타르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미국에 무슬림 형제단을 외국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하여 추진 중이다.
왜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 형제단을 위협으로 간주하는가?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국들은 2017년 6월 5일 공동 성명을 통해 카타르와의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하며, 외교 복원 조건으로 카타르가 테러리즘에 대한 근절에 동참하고 불법적 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13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테러와 연관된 59명의 개인과 12개 단체 목록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무슬림 형제단, 이집트 출신 이슬람학자인 유수프 알 까라다위(Yusuf al-Qaradawi)와 카타르 방송사인 알자지라의 폐쇄 요구가 포함되었다(Negri, 2018).
각 국가마다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갖는 적대감의 요인이 다르겠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동맹국은 일반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잘 조직된 정치 운동 조직을 확고한 독재 정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은 이슬람의 중요한 두 성지의 수호자(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를 자처하지만, 왕국 내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정치, 경제 및 안보에 대한 지배 왕가의 절대적 통치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전제 조건 하에서 종교 부문의 통제권을 부여해 왔다. 그런데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 무슬림 형제단은 왕가의 입장에 반대되는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1990년 걸프전 때는 사우디 영토 내에 미군 기지를 허용한 점을 비난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슬림 형제단 파생 단체로 알려진 알사흐와(Al Sahwa)는 미국 주둔에 반대하는 국내 시위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파하드 국왕에게 급진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사흐와 운동은 이슬람 통치체제 위에서 절대 군주제를 통해 정치체제를 독점적으로 관리 및 통제하는 알 사우드 왕가의 전통적 국가운영 틀에 도전하는 일탈된 행위였다(Ehteshami, et al., 2017).
2011년 아랍의 봄 시위의 결과로 무슬림 형제단과 엔나흐다(Ennahda)당이 각각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자 사우디와 같은 군주국들은 항상 품어왔던 두려움이 현실화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다른 아랍 국가들은 초국적 성격을 지닌 무슬림 형제단과 각국에 뻗친 파생 그룹들 간의 불투명한 연결성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였으며, 카타르가 역내 이슬람 단체들, 특히 주로 무슬림 형제단을 뒤에서 지원하여 그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동력으로 활용한다는 점에 이러한 의혹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카타르와 무슬림 형제단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카타르는 1인당 GDP가 70,290 USD(IMF, 2019)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집트나 요르단처럼 무슬림 형제단의 자선 활동이 견인력을 얻기 힘들다. 런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는 “무슬림 형제단이 여타 중동 국가에서 수행하는 지역 병원이나 학교 운영과 같은 전형적인 활동들은 대중적 인기를 안겨 주지만 불가피하게 국가의 합법성을 떨어뜨린다. 카타르는 시민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부유한 국가이기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의 일상적인 사회적 기능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침투가 어렵다”고 설명했다(Roberts, 2014).
그렇다면 주로 최하층을 대상으로 사회활동을 벌이는 무슬림 형제단이 어떻게 카타르에 지지기반을 마련하였을까? 사실 카타르가 국가 형성 때부터 지금과 같은 부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1930년-1940년대에 약 10,000-16,000명이던 인구가 1950년대에 약 25,000명으로 늘어날 때까지 카타르는 저개발 국가였다. 관료제도는 부재했고 주요 산업인 진주와 어업은 과도한 경쟁구도와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황폐해져 국가의 빈곤은 악화되었다. 그렇지만 1939년 대규모 유전의 발견 이후, 1950년대 석유 세원이 차차 유입되며 초창기의 원주민 의회를 중심으로 경제적 부국으로 탈바꿈되어갔다(Roberts 2014).
카타르는 초창기 관료주의를 세우고 국가의 형태를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했고, 1950년대 자격을 갖춘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인재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카타르로 이주한 무슬림 형제단원들은 특히 교육부문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왜냐하면 카타르는 1950년대까지 개별 교사에 의해 운영되는 비공식 종교 학교인 쿠탑(kuttab)만이 존재했으며 1951년 오직 한 곳의 공식 학교만이 존재할 만큼 현대적인 교육 시스템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카타르의 아미르 알리 빈 압둘라 알 싸니(Ali Bin Abdullah Al Thani, 재위 1949-60)는 와하비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압둘 아지즈 알 마나(Muhammad Abdul Aziz al-Mana)의 제자인 자심 알 다르위시(Jassim Al Darwish)에게 1952-53년에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임무를 부여했다(Freer 2018, 56). 다르위시는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창설 멤버 중 한명인 무힙 알 딘 알 카팁(Muhib Al Deen Al Khatib)으로부터 1954년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인 셰이크 압둘 바디 사끄르(Abdul-Badi Saqr)를 추천받았다. 사끄르는 학교 설립과 교사 임명에 관여했으며, 그에 의해 영입된 교사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이데올로기에 이념적으로 찬동하던 인물들로 채워졌다. 다르위시는 또 다른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였던 셰이크 주하이르 알 샤위쉬(Sheikh Zuhair Al Shawish)를 영입하였다. 샤위쉬는 교육부에서 정식 학교의 확대와 교육 부서를 감독하고 교육부의 후원 하에 여성 교육을 추진했다(Roberts 2014). 1958년에는 무슬림 형제단 소속의 존경받는 이슬람학자인 에젯딘 이브라힘(Ezzeddin Ibrahim)이 학교 교과과정을 담당하는 부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960년 교육부 소속 이슬람학 책임자인 압둘라 빈 투르키 알 수바이(Abdullah Bin Tukri Al Subai)는 카이로의 알아즈하르(Al Azhar)대학에서 이슬람 교사와 관리를 모집했는데 이때 유수프 알 까라다위와 카타르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수바이의 부름으로 카타르로 건너온 까라다위는 처음에 종교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차후 카타르 대학 샤리아학부(College of Sharia)를 설립하고 학장의 지위까지 올랐다. 까라다위의 절친한 친구인 아흐마드 알 아살(Ahmed Al Assal)은 1960년 까라다위를 도와 카타르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결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46년 하산 알 반나의 개인 사절 자격으로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바 있는 압둘 무잇즈 알 사타르(Abdel Moaz Al Sattar)는 교육 감사직을 역임했으며, 1960년대 초 카타르 국정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 또 다른 무슬림 형제단원인 케말 나지(Kemal Naji) 박사는 1964-1979년까지 교육부의 외국 문화관계 고문 및 출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분야에 종사했다. 이처럼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카타르의 교육부문 채용은 이주한 무슬림 형제단 출신 인사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Roberts 2014).
한편, 무슬림 형제단 출신 주요 인사들의 카타르 입성 경로는 이집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50년 팔레스타인에서 온 라피끄 샤키르 알 나트샤(Rafiq Shakir Al Natshah)는 1950년대 초반 카타르 교사이자 교과서 집필자로 활동하다가 교육부의 고위직책까지 올랐으며, 자심 빈 하마드 알 싸니(Jassim bin Hamad Al Thani)의 개인 자문으로 인정받아 카타르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나 고향으로 귀환한 뒤 시민권을 포기하고, 1979-1991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PLO 대표를 역임했다.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LO) 수반인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는 1957년 9월부터 1969년까지 카타르에 거주하였으며 1969년 교육부에서 일하면서 유수프 알 까라다위를 도운 경력이 있다. PLO의 초대 수반이였던 야세르 아라파트(Yassir Arafat)의 정치 고문과 내부 장관을 역임한 하니 하산(Hani Hassan)도 카타르 교육부에서 근무했으며, 파타의 창립 멤버이자 보안기구의 책임자였던 무함마드 유수프 알 낫자르(Mohammed Yusuf Al Najjar)는 카타르 교육부 소속 교사였다. 파타의 창립자 중 한명인 카말 아드완(Kamal Adwan)은 카타르에서 엔지니어로 종사하며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를 비롯한 다른 파타 설립자들을 만났다. 이렇듯 카타르는 쿠웨이트와 함께 팔레스타인 이주자들의 주요 궤적이었으며, PLO의 지휘부가 될 동시대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조우했다. 그리고 1950-60년대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파타(Fatah)의 주요 지도자들로 급부상했다.
다음의 이주물결은 시리아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하페즈 알 아사드(Hafez al-Assad, 재위 1971-2000)는 그의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무슬림 형제단의 거점인 하마(Hama)를 폭격하였다. 소위 하마 사태의 결과로 약 15,000명의 마을 주민들이 사망하였고, 극심한 진압을 피해 일부 무슬림 형제단원들은 카타르로 이주하였다.
마지막 이주 그룹은 2001년 9월 11일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도착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탈출한 일부 무슬림 형제단원들은 카타르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했는데, 그들은 사우디의 와하비즘 학자들과 연합하여 보다 급진적인 이슬람을 개발하고 이를 외부 세계에 수출했다. 그런데 9.11에 연루된 테러리스트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마침내 이슬람의 극단적인 파생물인 와하비즘이 무슬림 형제단의 이데올로기와 혼합되는 경우 왕실의 안정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설립한 알카에다는 이 신성하지 못한 혼합의 결실인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쫓겨난 많은 무슬림 형제단원들은 카타르에서 따뜻한 쉼터를 찾았다(Roberts 2014).
카타르 무슬림 형제단 영향력의 실체
아랍 정권에 대한 선동과 반정 그룹에 대한 고무,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며, 이슬람적 가치를 찬양하고 때론 극단주의에 대한 옹호적 태도를 보인 무슬림 형제단의 네트워크 확대와 대중성의 증가 현상은 카타르 배후 지원설을 증폭시켰다. 카타르와 무슬림 형제단이 중요한 연관성을 지닌 것은 분명하다. 워싱턴 기반의 싱크탱크 연구소인 시큐리티 스터디 그룹(Security Studies Group)의 데이비드 리아보이(David Reaboi) 전략팀 부수석은 둘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카타르는 세계에서 가장 호의적인 무슬림 형제단의 기반이다. 알자지라는 합법적이고 저널리즘적인 기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카타르 정권의 권력 투영 도구이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라는 적들을 공격하면서 카타르 집권 왕가와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Arabnews, 2019)”.
카타르가 무슬림 형제단을 옹호하는 이유에 대하여 일부 중동 전문가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키워 중동 지역 내 패권을 쥐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카타르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을 희생시킴으로써 외교적 힘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우디 등 이웃국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확보할 가치가 있는지, 카타르가 왜 다른 걸프 아랍 국가들과의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고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해주기에는 부족하다.
초창기 카타르가 무슬림 형제단원을 받아들인 핵심 동기는 교육 분야부터 신흥 관료주의 수립과 관리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기본적인 인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1950-1960년대 이슬람 세계에서 이집트의 소프트 파워는 최상위에 달했고 권위 있는 새로운 운동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학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카타르 입장에서는 나세르 치하에서 피난처를 찾는 지식인들이 수요공급의 논리에서 필요한 인력들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한 수바이나 다르위시와 같은 종교 학자들이 초기 인재 영입을 주도하다보니 당연히 그들이 선호하는 인재들이 유입되었다.
그렇지만 국내 정치권 내에는 바트당이나 범아랍주의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무슬림 형제단의 확대를 저지하려는 세력들도 있었다. 1957년 통치 가문 내 반대파와 내부 권력 투쟁 중이던 셰이크 칼리파 빈 하마드 알 싸니(Khalifah Bin Hamad Al Thani, 재위 1972-1995)는 사끄르 일원을 해체하기 위한 충분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셰이크 칼리파는 사끄르를 대신해 1960년대 시리아 출신 교육 정보부 장관을 역임한 범 아랍 민족주의자인 압둘라 압둘 다임(Abdullha Abd Al Daim) 박사를 영입했다. 범 아랍주의자인 셰이크 칼리파는 내부적 권력을 쟁취하는데 교육부문을 장악하여 이용하려는 계획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 찬탈에 대한 내부 견제로 인해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Roberts 2014). 이는 다른 말로 무슬림 형제단이 카타르에 안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카타르 왕가 내부의 엘리트 경쟁이 작용했으며, 카타르가 무슬림 형제단을 비호하는 것은 카타르 엘리트 간 정치적 세력 투쟁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선호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 수준에서 그렇다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던 카타르는 당시 권위 있는 정치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을 유치함으로써 역내 입지를 드높일 수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카타르의 명성을 높여주고 -그것이 호평인지 악평인지에 상관없이- 그 대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단인 알자지라를 얻었다. 알자지라의 중요한 콘텐츠 중 하나인 이슬람은 이집트에서 시작된 첫 번째 이주 물결과 함께 도하로 건너온 유수프 알까라다위(Yusuf al-Qaradawi)가 운영하는 ‘샤리아와 삶(Shariah and Life)’이라는 유명한 주간 프로그램에서 중대하게 다루어졌다(남옥정, 2017).
까라다위는 알자지라가 제공한 플랫폼을 이용하여 이슬람, 특히 수니파 무슬림들 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집트 사상가인 마문 펜디(Maamun Fendi)는 알자지라에 종사하는 인력의 약 50%가 무슬림 형제단에 속해 있으며, 무슬림 형제단의 선전 도구로써 활용되는 알자지라 위성채널이 야심찬 국왕의 손에 쥔 무기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펜디에 따르면 카타르는 알 우데이다(Al Udeida) 미 공군기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무슬림 형제단을 수용함으로써, 아랍 지도자들에게 향하는 저항의 목소리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완벽한 공식을 발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Abrams, 2013).
또한 카타르는 수십 년 동안 축적해온 무슬림 형제단과의 관계성이 지역 개입을 촉진하는 데 시간을 단축시켜주었다는 점을 아랍의 봄 이후 재편되는 역내 정치구도속에서 국가의 부상이라는 결과를 통해 완벽히 이해했다(Roberts 2014). 알자지라가 무슬림 형제단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플랫폼으로 이용되면서 카타르는 이웃국들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주요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궁극적으로 카타르는 수십 년간 노력해온 지역 내 존재감 확보라는 소기의 목적에 도달했음을 체감한 것이다.
그런데 카타르에 유입된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 강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카타르 정책에 전이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와하비즘을 버리는 것은 타밈 가문의 통치정당성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카타르는 살라피 와하비즘을 신조로 삼은 나라이며, 한발리파(Hanbali)가 우세하다. 왕가는 와하비즘(Wahhabism)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압둘 와합(Mohamed Abdul Wahhab)과 같은 중앙 아라비아 부족인 바니 타밈(Bani Tamim) 출신으로 카타르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와하비즘을 고수해왔다. 카타르가 비록 무슬림 형제단원의 유입을 환영했을지라도 2011년 완공된 카타르 그랜드 모스크를 이맘 압둘 와합(Imam Abdul Wahhab) 모스크로 명명그 만큼, 이데올로기를 갈아탈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다. 더욱이 카타르는 종교 학자들이 국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기회를 제한했다. 카타르에는 그랜드 무프티(Grand Mufti) 사무소가 없으며 1993년이 되어서야 종교성이 만들어졌다. 이집트인들에 의해 주로 집필된 교과서도 제도적으로 어느 선에서 제한적이었다. 또한 지역 병원이나 학교를 운영하는 형식으로 국가가 수행해야 할 사회적 기능을 대리함으로써 시민 사회로부터 인기를 얻는 무슬림 형제단의 전형적 방식은 카타르에서 통하지 않는다. 카타르는 시민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부유한 렌티어 국가(Rentier state)[3]이다. 칼리파 왕자가 1972년 그의 조카인 아흐마드 빈 알 싸니(재위 1960-1972)로부터 왕좌를 찬탈한 후,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더 넓은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예산 확대, 일자리 창출, 주택 건설, 연금 및 임금 인상 등 지원을 다양화했던 통치방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Freer, 2018). 카타르 정부의 복지혜택은 무슬림 형제단의 전형적인 활동들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이슬람주의자들이 시민사회에 뿌리내리는 여지를 없앤다. 또한 정당 활동이 금지되어 있어 알제리나 레바논의 무슬림 형제단처럼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기회도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카타르 내 무슬림 형제단의 두 가지 주요 기능이 본질적으로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는 카타르와 무슬림 형제단의 관계에 대하여 왜 그렇게 우려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프리어(Freer)는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단체는 사실 현대화가 세속화 및 서구화를 동반하여 진행된 국가들에서 이데올로기적 호소력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걸프 국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며,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은 사실상 걸프 지역에서 가장 잘 자리 잡은 독립적인 사회운동이라고 설명한다(Freer, 2018). 1960년대 초 무슬림 형제단은 카타르를 걸프국가로 확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영향력 있는 알자지라 플랫폼을 이용하여 특별한 견인력을 발휘했다.
카타르는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와 막대한 석유 보유국이지만 아직은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 및 이란문제 등 아랍 세계가 당면한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중재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소국인 카타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간섭을 피하고, GCC라는 한 바구니에 모든 달걀을 담는 리스크를 지양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과 협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카타르 내 무슬림 형제단 진흥을 통해 그 길을 찾았다. 결국 카타르와 무슬림 형제단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카타르의 중동 패권 추구라는 비가시적 요인보다는 상호 이익추구라는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양 측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 소개
남옥정(happy2oj@hanmail.net)은
현재 단국대학교 GCC국가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주로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연구, 특히 이 지역의 쿠르드 문제를 연구해왔다. 최근에는 아랍의 봄 이후 걸프 지역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중동패권지형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적 지역 개입 양상 및 예멘과 이라크의 지역불안전성 연구를 진행 중이다.
참고문헌
- 남옥정(3 Aug, 2017). “카타르 사태 본질에 선 인물, 유수프 알 까라다위”, GCC Report biweekly, GCC국가연구소
- Arabnews(Feb 2019.). “Qatar a hospitable base for Muslim Brotherhood, says Washington think-tank”, http://www.arabnews.com/node/1455236/middle-east (검색일: 2019. 4.16).
- Abrams, Elliott(2013). “Al Jazeera Backs the Muslim Brotherhood”,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 Ehteshami, Anoush and Mohammadi, Ariabarzan(June 2017). “Saudi Arabia’s and Qatar’s Discourses and Practices in the Mediterranean”, MEDRESET, No. 6.
- Freer, Courtney(2018). Rentier Islamism: The Influence of the Muslim Brotherhood in Gulf Monarchies, Oxford University Press
- Negri, Alberto(2018). “Gulf Regional Crisis: Qatar-Saudi Arabia Rivalry, Tensions within the Gulf Cooperation Council”, Geographical Overview, The Euro-Mediterranean Partnership and Other Actors
- Roberts, David(2014). “Qatar and the Muslim Brotherhood: Pragmatism or Preference?” Middle East Policy Council Vol XXI No.3.
https://www.mepc.org/qatar-and-muslim-brotherhood-pragmatism-or-preference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