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말하고 안보를 구축하다: 전쟁 속 튀르키예 외교

한하은(아시아연구소)

2026년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전쟁은 중동 질서를 급격히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튀르키예는 전통적인 동맹 구조와 지역 강국으로서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복합적인 외교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최근 강조한 “수니와 시아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반유대주의 역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발언은 튀르키예 외교의 핵심 방향을 보여준다. 이는 평화와 통합을 강조하는 공식 담론과, 실제 안보·외교 정책 사이의 긴장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전쟁 발발 직후 튀르키예의 대응은 비교적 일관된 패턴을 보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 국제법적 문제를 제기하며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한편, 자국 영공과 군사 자산이 작전에 사용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직접적 개입 가능성을 차단했다. 동시에 이란의 보복 공격 역시 문제 삼으며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서지 않는 균형적 태도를 유지했다. 이는 NATO 회원국으로서 서방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란과의 경제·안보 협력을 병행하려는 ‘헤징 전략’의 전형적 사례다.

이러한 균형 외교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도구가 바로 ‘담론 정치’이다. 튀르키예는 이슬람 국가 정체성을 활용해 종파 갈등을 완화하는 메시지를 전략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수니 중심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시아 종주국인 이란과의 관계에서 ‘움마’라는 통합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갈등의 종파화를 억제하고, 동시에 중재자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결합함으로써, 이슬람 세계 내부와 서방 국제사회 모두를 의식한 규범적 균형을 시도하고 있다. 즉, 해당 발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외교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전략적 언어로 기능한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튀르키예는 점차 적극적인 외교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다자 협력 구도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와 함께 중재 노력에 참여하며 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외교적 채널 형성에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튀르키예가 단순한 지역 행위자를 넘어, 갈등 관리와 협상 촉진을 수행하는 ‘중재 허브’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시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 담론과 외교적 중재 노력은 안보 현실과 결합되면서 뚜렷한 긴장을 드러낸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미사일 위협과 역내 군사적 불안정은 튀르키예로 하여금 자국 안보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강화하도록 만들었으며, 필요 시 대응 가능성을 열어두는 입장을 취하게 했다. 즉, 외교적으로는 평화와 중재를 강조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억지력과 대응 의지를 유지하는 이중적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국내 정치 요인과 결합되면서 더욱 구조화된다. 특히 쿠르드 노동자당(PKK) 문제는 튀르키예 외교·안보 정책을 규정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쿠르드 문제는 영토 보전과 국가 정체성에 직결된 사안으로, 튀르키예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에서 군사 작전을 지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이란과는 제한적 협력을 유지하는 한편, 과거 미국의 시리아민주군(SDF) 지원은 튀르키예에게 지속적으로 안보 위협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양국 관계에서 구조적 긴장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경제적 제약과 정치 일정 역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고물가와 통화 불안 속에서 대외 군사 개입은 상당한 비용을 수반하며, 특히 이란이 주요 에너지 공급국이라는 점에서 관계 악화는 경제적 부담으로 직결될 수 있다. 동시에 향후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부는 강경한 안보 메시지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켜야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적 충돌을 회피해야 하는 전략적 제약에 직면해 있다.

결국 전쟁 속 튀르키예의 대이란 정책은 이슬람 정체성, NATO 동맹 구조, 그리고 쿠르드 문제·경제 위기·선거 정치라는 국내 요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복합적 산물이다. 에르도안의 ‘평화’ 발언과 ‘보복’ 가능성은 모순이라기보다 상충하는 요구를 관리하기 위한 전략적 균형의 표현이다. 튀르키예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중재와 영향력 확대를 동시에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불확실한 지역 질서 속에서 자국의 전략적 공간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 전략은 본질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전쟁의 장기화, 이란 체제의 변화, 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확장이 현실화될 경우 튀르키예는 보다 명확한 선택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재의 외교는 단순한 중립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 기회를 관리하는 고난도의 전략적 실험이며, 그 지속 가능성은 향후 전쟁의 전개 양상과 국내 정치 변수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