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이 2월28일 이란 전역에 대규모 합동 공습을 감행했다. ‘장엄한 분노(Epic Fury)’와 ‘포효하는 사자(Roaring Lion)’로 명명된 이 작전으로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비롯한 수십명의 수뇌부가 제거됐다. 올해 1월, 이란 정권은 1979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총탄으로 진압하며 수천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그 정권의 수장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이스파한과 카라지의 거리에서는 경적이 울리고 테헤란 옥상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47년간 억압받아온 이들의 기쁨은 진심이었고, 그 감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나의 이란 친구는 고국의 가족들 안위가 걱정되면서도, 다가올 이란의 변화가 기대된다는 이중적인 감정을 전했다.
하메네이의 제거가 곧 이 전쟁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번 이란 공습을 ‘선제적 위협 제거’라는 언어로 정당화했다. 이는 국제질서를 힘의 논리로 대체하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이번 공습에서 가장 먼저 스러진 것은 ‘정권’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호르모즈간주 미나브의 여자 초등학교가 공습으로 무너져 내렸고, 7세에서 12세 사이의 여학생 등 165명이 숨졌다. 공습이 시작된 시각은 오전 10시, 아이들이 한창 수업 중인 때였다. 학교 인근에 혁명수비대 해군기지가 있었다고 하나, 잔해 속에서 발견된 것은 무기가 아니라 가방과 교과서였다. 수업 중인 교실이 파괴된 현실 앞에서 ‘정밀 타격’이라는 수사는 공허하다. 정확한 수치 논쟁 이전에, 민간인 보호 의무가 명백히 실패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군사 목표와 민간시설을 구별하지 못한 공격은 명분이 무엇이든 위법의 소지가 크다. 그럼에도 국제사회 담론은 빠르게 ‘권력 공백’과 ‘원유 시장’으로 이동했고, 아이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부차적 피해로 취급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외부의 폭격이 이란 시민의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부의 폭격은 시민의 자유를 확장하기보다, 정권에 비상통치의 명분을 제공하고 반체제 시민을 ‘외세의 협력자’로 낙인찍게 해왔다. 이란에 대한 무차별적인 미사일 공격은 민주화의 지름길이 아니라, 강경파의 재결집과 사회의 군사화를 가속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 사회의 정치적 미래를 책임질 의지도 없으며, 이들은 이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반복적으로 이란의 자주권을 위협한 행위자였다. 이번 사태는 이미 국경을 넘어 확산됐다. 이란은 보복 과정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카타르,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지의 미군 기지까지 공격 범위를 넓혔다. 선제공격이 평화가 아닌 전면적 지역 전쟁을 촉발한 셈이다.
이란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과, 국제법을 무너뜨리는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교실에서 수업을 받던 아이들의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이미 반복된 비극의 방관자가 된다. 이란의 미래는 드론과 미사일이 아니라, 거리로 나선 시민들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다. ‘자위권’이라는 언어가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까지 합리화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