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시작한 예멘 전쟁은 내적인 갈등을 외세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하디 대통령의 의지와 후시반군을 지원하는 이란을 제어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결의가 맞물려 국제전으로 비화하였다. 고대 향료무역의 거점으로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라고 불렸던 예멘은 오스만제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독립하여 남북예멘 두 정체로 존재하다가 1990년 통일예멘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통합보다는 권력유지에 노심초사한 살레 정권은 근대국가를 세우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외세가 개입하여 현재 3년 넘게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실패한 국가의 전형 예멘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비참한 아라비아(Arabia Misera)”가 되었다. [1]


박현도 (명지대학교)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끝에 자리 잡은 예멘은 북쪽 육지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1,458킬로미터, 동쪽 육지로는 오만과 288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서쪽으로는 홍해, 남쪽으로는 아랍해가 펼쳐져 있는 나라다. 국민 평균 연령이 19.5세이고, 25세 이하 인구가 전 국민의 61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나라지만[2], 아랍국가 중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제사정이 열악하다. 그러나 고대에는 로마로 이어지는 아라비아 향료무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과거 예멘은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로 불렸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지만 이제 예멘은 실패한 국가의 실상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비참한 아라비아(Arabia Misera)’다.

지금 현재 예멘에는 상인들의 바쁜 걸음으로 붐볐을 대상로 대신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생지옥이 펼쳐지고 있다. 2015년 3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축이 된 반(反) 후시(Huthi)반군 동맹군이 예멘의 과도정부 수반 하디(Abdrabbuh Mansur Hadi) 대통령의 요청에 응하여 ‘결정적 폭풍 작전(Operation Decisive Storm, Amaliyyat Asifat al-Hazm)’이라는 이름으로 예멘의 수도 사나 소재 후시반군의 미사일 기지를 공습하면서 시작된 예멘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다. 내전이 국제전으로 비화한지 4년이 되어간다. 굳이 내전이 아니더라도 이미 실패한 국가로 불리던 곳이라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멘은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있는가? 이 글은 역사를 거슬러 실패한 근대국가 예멘의 모습을 살피며 오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남북예멘

근세기 예멘은 수도 사나(Sanaa)가 중심이 된 북쪽은 1918년까지 오스만제국이, 항구도시 아덴(Aden)이 축이 되는 남쪽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하였다. 오스만제국이 떠난 북쪽은 자이디(Zaydi) 시아파가 다스렸다. 서구학계에서는 시아파를 시아무슬림들이 따르는 이맘의 수에 따라 이름을 붙였는데, 이에 따르자면 자이디는 5이맘파, 이스마일리(Isma‘ili)는 7이맘파, 이란의 이마미(Imami)는 12이맘파로 불러왔다. 이 중 12이맘파는 전통적인 아랍어 명칭이지만, 5, 7 이맘파는 현대 신조어다. 자이디 시아는 아랍어로 자이디야(Zaydiyyah)라고 부른다. 편의상 학계에서는 5이맘파 시아로 간주하는데, 오늘날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산재한 7이맘파 이스마일리 시아와 이란에서 국가를 이룬 12이맘파 시아와는 역사적으로 다른 분파다.

자이디 시아는 740년 이라크 쿠파(al-Kufah)에서 순니 우마이야 정권에 반기를 든 자이드(Zayd b. ‘Ali b. al-Husayn, 75/694-5년 생. 122/740년 사망)를 이맘으로 추종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쿠파의 반란은 실패하였고, 자이드는 죽었다. 자이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와 예언자의 딸 파티마의 증손자로, 3번째 이맘 후세인의 아들이자, 12이맘파의 5번째 이맘 무함마드 알바끼르의 이복형제다.

시아파 이맘 계보와 분파. 필자작성.

자이디 시아는 불법적인 순니 통치에 저항하는 것을 종교적 의무로 간주한다. 그러나 다른 시아파와 달리 이맘의 은폐(隱蔽), 마흐디의 도래(到來)를 믿지 않는다. 자이디는 알리의 집안사람, 즉 알리의 두 아들 하산과 후세인의 후손이라면 누구든지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이맘의 무류성(無謬性, ma‘sum)을 수용하지 않는다. 또 시아인 것을 감추는 타끼야(Taqiyyah)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마미 시아와 비교하여 자이디 시아가 순니와 크게 다를 바 없고, 순니에 대한 태도가 온화하다고하면서 온건한 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이디 시아는 불법적인 순니 통치에 강력히 저항하였기에 정치적으로는 이마미 시아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다. 따라서 자이디 시아를 이마미 시아보다 더 온건한 시아로 보는 것은 역사적 전개과정을 보았을 때 수긍하기 어렵다.

역사상 자이디 시아의 중심지는 카스피해 지역과 예멘이었다. 자이디는 8-9세기에 카스피해 남쪽 타바리스탄(Tabaristan)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였지만, 역사적 부침(浮沈)을 겪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세력을 상실하고 12이맘파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예멘의 자이디 공동체는 890년에 처음 생겼고, 1539년 오스만제국에 편입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1595년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든 후 1635년 오스만제국 총독을 축출하고 독립하였다가 1872년 다시 오스만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붕괴함에 따라 독립 자이디 이맘조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962년 9월 이맘 아흐마드가 죽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가 아흐마드의 후계자인 아들 무함마드를 1주일 만에 끌어내려 자이디 이맘조를 무너뜨리고 ‘예멘아랍공화국’을 세웠다. 권좌에서 밀려난 자이디는 북서부 사으다(Sa‘da)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예멘 내 시아 인구는 예멘 총인구 대비 35-40% 수준으로, 약 800만 명에서 1,000만 명에 이른다.[3] 이맘조가 무너지면서 다수가 순니로 개종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예멘 인구에서 자이디가 차지하는 비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북예멘과 달리 남예멘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839년 아덴항을 장악한 영국은 남예멘을 인도의 일부로 간주하여 통치하였고, 1937년 아덴을 보호령으로 삼고 이를 거점으로 남예멘 지역을 장악하였다. 영국이 손에 넣은 남예멘 지역은 전체 예멘의 삼분의 이에 달하였다.

한 세기를 넘긴 영국의 남예멘 통치는 1963년 본격적인 반영항쟁으로 흔들리더니 결국 1967년 영국이 철수하면서 남예멘에 ‘남예멘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급진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1970년 국호를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친소련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고, 소련 해군에게 항구를 열었다.

 

통일예멘
1918-1934년 예멘. 북부 자이디 왕정과 남부 영국보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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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 남북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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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으로 나뉘고 국가의 노선도 달랐지만, 분단된 한반도와 달리 남북 예멘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비록 1972년과 1979년에 양측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아랍연맹이 중재 역할을 하였지만, 1980년대에는 비교적 양측 관계가 평온하였다. 통일은 소련의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 1990년 5월 22일 양측은 통일에 합의하고 ‘예멘공화국’ 성립을 선포 하였다. 새로운 예멘공화국은 북예멘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1947-2017)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남예멘 알베이드(Ali Salim al-Baydh) 사회당 당수를 부통령으로 하여 출범하였다. 수도는 북예멘의 수도였던 사나로 삼았다. 남예멘의 수도였던 아덴은 경제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통일예멘의 앞길은 험난하였다. 무엇보다도 국민통합에 실패하였다. 통일 후 처음으로 거행한 1993년 총선은 남북 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북예멘 지역은 북쪽에 기반을 둔 민중당과 이슬라흐(Islah)당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남쪽은 사회당이 의석을 싹쓸이 하였다. 더욱이 경제상황도 좋지 않았다. 급기야 경제난으로 내부 불만이 격렬해지더니 통일에 합의하였던 남예멘의 알베이드가 주축이 되어 통일예멘에서 남예멘이 소외되었다고 불만을 표하며 1994년 5월 21일 다시 아덴을 수도로 하는 남예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남예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살레 대통령은 7월 7일 아덴을 점령하여 내전을 끝냈다. 서둘러 내분을 봉합하였지만, 통일예멘의 발전과 국민통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쪽의 골칫거리는 후시(Huthi)반군이었다. 북부 예멘에서 소외받고 전통을 잃어가는 자이디 시아 정체성 수호를 기치로 내건 후시반군은 자이디의 핵심 주거지인 사으다에서 자치권 확대를 위해 힘을 모았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반미 반정부기치를 드높였으나 살레 당시 중앙정부의 개입과 진압에 막히자 저항세력으로 변하였다.

남쪽의 소외감도 심각하다. 남예멘인들은 아랍의 봄 이래 ‘남부운동(Southern Movement, al-Hirak al-Janubi)’을 결성하여 남예멘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도 예멘을 위협하였다. 순니 극단주의 사상은 살라피, 와하비 무슬림들이 전파하였고, 알카에다 아랍반도 지부가 예멘에 똬리를 틀었다. 수없이 많은 부족으로 나뉜 예멘은 부족주의의 폐해로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었고, 살레의 교묘한 독재정치가 통일예멘의 발전을 계속 가로막았다. 예멘 난민 유입의 결정적 계기가 된 2015년 발발 예멘전쟁은 위의 5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골고루 작동한 결과물이다.

 

후시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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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르 앗딘 알후시(1956-2004)
출처: http://almasdaronline.com/article/46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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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드 알말리크 알후시(1979-)
출처: https://fanack.com/yemen/faces/abdulmalek-al-hout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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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바드르 앗딘 알후시(Husayn al-Badr al-Din al-Huthi, 1956-2004)의 이름에서 연유한 후시 반군의 종교적 정체성은 자이디 시아다. 후시 반군은 1990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사상이 지역에 사으다 지역의 자이디 시아파 사람들에게 침투하는 것을 막고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으다 지역에서 와하비 사상이 위협적인 요소로 부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첫째, 걸프지역에서 일하거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로 활약하다 귀국한 예멘인.
  • 둘째,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지원과 출판물.
  • 셋째, 예멘의 이슬라흐(Islah)당.
  • 넷째, 지역 살라피(Salafi) 무슬림(Salmoni et al 2010).

와하비의 위협에 대항하여 자이디 시아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결과 하끄당(Hizb al-Haqq)이 결성되었다. 당시 하끄당은 와하비 이슬람을 제국주의의 산물로 여겼다.

“와하비주의는 제국주의의 자식이다 … 우리는 제국주의가 우리나라에 이슬람이라는 옷을 입고 들어 와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 사우디아라비아는 엄청난 돈을 예멘에 쏟아 부으며 와하비 이슬람을 퍼뜨리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노력에 맞대응해야 한다(SELVIK & STENSLIE 2011).”

후시 반군 지도자 후세인 바드르 앗딘 알후시의 부친 셰이크 바드르 앗딘 알후시가 하끄당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처음의 기대와 달리 하끄당은 예멘의 국내 정치 현실에 타협하면서 자이디 시아의 염원을 구체화하지 못하였다. 반면 1994년경부터 자이디 시아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젊은 신앙인(Muntada al-Shabab al-Mu’min)’이라는 조직으로 결실을 맺었다. 셰이크 바드르 앗딘 알후시의 아들들이 참여한 젊은 신앙인은 여름학교[4]와 같은 캠프를 운영하면서 학습과 놀이를 병행하면서 자이디 정체성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1994-1995년에 사으다 전역에서 무려 10,000명에서 15,000명에 이르는 자이디 시아가 하마자트를 위시한 여러 지역에 모여 오전에는 꾸란 학습, 자이디 전통교육, 이슬람 신앙교육, 오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하여 운동과 드라마와 같이 여흥을 즐기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교육을 통해 자이디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Salmoni et al 2010).

‘젊은 신앙인’의 교육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의미를 지닌다(Salmoni et al 2010). 첫째, 1962년 이전 자이디와 1990년대 자이디 및 오늘날 후시 핵심부를 연결하는 인적, 조직적 연계 고리다. 둘째, 자이디의 전통적인 관습과 달리 현대적인 모습을 띄었다. 셋째, 젊은이들이 현대적 입장에서 신앙과 교리를 해석하였다. 넷째, 살라피 순니의 위협에 대처하면서 젊은이들을 자이디로 다시 불러 모으고 사회적 무관심에 대응하였다. 다섯째,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예멘정부는 일정정도 지역 세력을 지원하였는데, 젊은 신앙인도 이러한 지원의 혜택을 받았다.

사으다 지역 자이디 시아가 ‘젊은 신앙인’을 중심으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 나선 데에는 사회 환경 변화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990년 남북 예멘 통일,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 등 급변하는 정치 환경과 아울러 예멘 통화의 가치 급락이 뒤따랐고, 걸프지역에서 일하던 예멘 노동자가 무려 100만이나 귀국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예멘의 인구 증가와 함께 특히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이래 순니의 반시아 감정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사상과 더불어 유입되어 기존 예멘의 살라피 무슬림들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1970-1980년대에 태어난 사으다 지역의 신세대는 1962년까지 예멘을 통치한 자이디 이맘조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공화정주의자들의 반 자이디 서술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된 사으다의 현실을 보면서 정부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젊은 신앙인’은 후세인 바드르 앗딘 알후시가 이끌었는데, 2003년 예멘정부가 미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략을 용인하자 ‘젊은 신앙인’은 반미, 반정부 목소리를 높이면서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긴급 진압에 나선 정부는 2004년 후세인을 체포하고자 군을 투입,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정부군은 800여명에 이르는 자이디를 체포하고, 후세인을 사살하였다. 이러한 참극을 계기로 ‘젊은 신앙인’이 후시 반군을 결성하였다. 후시 반군은 후세인의 동생 압드 알말리크 알후시가 ‘안사룰라(Ansar Allah)’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Allah akbar, al-Mawt li-Amrika, al-Mawt li-Israil, Alla‘na ‘ala al-Yahud, al-Nasr li’l-Islam)”이라는 구호에 선명하게 잘 드러난다.

2004년부터 2010년 정전협상 때 까지 정부군과 후시 반군의 충돌로 인해 북부 예멘에만 무려 30만 명에 이르는 내부 난민이 발생하였고, 이중 7,000명은 유엔 난민캠프가 수용하였다. 이러한 분란이 현재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순니와 이란의 시아라는 국제전 성격으로 발전되었다. 정부와 사으다 지역 자이디 시아의 갈등을 되돌아보면 후시반군의 성격을 다음 몇 가지 요소로 가늠할 수 있다.

첫째, 점차 약해져가는 자이디 시아를 지키려는 종파적 생존 본능이 작동하였다. 예멘인 대다수는 샤피이 학파를 따르는 순니다. 또 사우디를 통해 와하비 사상이 침투하여 자이디를 와하비로 유도하고 있다. 살레도 자이디지만, 후시의 입장에서 보면 살레는 종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자이디일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와 협력하였기에 종파적 동질성을 느낄 수 없는 대상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살레가 대표하는 현대적 자이디에 대한 전통적 자이디의 반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이디 시아는 주거주지역인 사으다의 자치권을 확보하여 자이디 전통을 지키려 하였다.

둘째, 정부군과 충돌이 심화되면서 살레 정부에 대한 분노가 증강되었다.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정치적 저항으로 발전하였다. 종교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데, 자이디 시아는 살레 정부가 이러한 고통을 묵과한다고 느꼈다. 또한 여타 부족에서 친정부 용병이 투입되면서 부족 간 갈등의 양상을 보였다(Clark 2010).

셋째, 2009년 후시반군을 절멸하기 위해 살레정부가 ‘초토화 작전’을 펼치면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의심을 샀고, 이로 인해 국내 문제가 국제 문제로 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다른 국가와 협의 없이 전격전을 폈으리라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Boucek 2010).

예멘 종교분포 지도
© DIVERSE+ASIA

 

내전

2011년 1월 튀니지 벤알리의 24년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시작한 이른바 ‘아랍의 봄’은 예멘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북예멘이 통일되기 전 북예멘에서 1978년부터 집권하였고, 통일예멘의 유일한 대통령이었던 살레의 권력기반 역시 민주화 시위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살레는 의회로부터 면책을 약속받고 2012년 2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하디(Abdrabbuh Mansur Hadi)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 과도정부를 맡았다. 새로운 정부는 각계 대표 565명으로 국민대화협의회(National Dialogue Conference, Mu’tamar al-hiwar al-watani al-shamil)를 구성하여 새로운 예멘을 만들기 위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협의회의 중점 논의 사항은 다음 9가지 현안이었다. ① 남예멘, ② 사으다 지역, ③ 사법, ④ 국가건설, ⑤ 행정, ⑥ 군과 안보, ⑦ 특별현안, ⑧ 권리와 자유, ⑨ 개발(Pradhan 2017).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논란거리는 새로운 예멘을 어떠한 형태로 구성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하디 대통령은 22개 예멘 지역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에게 예멘 연방 구성안을 맡겼고, 그 결과 북예멘을 아잘, 사바, 자나드, 티하마 등 4개 지역, 남예멘을 아덴과 하드라마우트 2개 지역으로 나누어 새로운 예멘을 모두 6개 지역으로 분할된 연방으로 구성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수도 사나는 특별지역 지위를 부여하여 위 6개 지역 어느 곳과도 관련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2014년 1월 27일 국민대화협의회는 최종보고서를 채택한 후 해산하였지만 새로운 연방구성에 대해 후시반군과 남부운동은 6개 지역 분할안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국민대화협의회의 합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헌법을 쓰는 임무를 맡은 제헌위원회의 헌법 논의는 난항에 부딪혔다.

사실 후시와 남부운동은 국민대화위원회에서 현안을 두고 여러 차례 논의를 지체하거나 회의에 불참하여 이미 불화를 초래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할안은 양측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후시는 분할안이 예멘을 빈부 차에 따라 나눈다고 비판하였고, 자신들을 고립시키려는 속임수로 인식하였다. 남부운동 일부 역시 남예멘을 분할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부하였다. 하디정부는 통일 이전의 예멘처럼 남북 두 지역으로 나누어 연방을 이룰 경우 남부가 분리 독립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양자 분할대신 6개 지역 분할안을 선호하였다.

국민대화협의회

단체 구분 대표수
정당 263
민중당(구 여당) 112명
알이슬라흐당(구 야당) 50명
예멘사회당(구 야당) 37명
나세르당(구 야당) 30명
5개 소수 이슬라흐당(구 야당) 각 4인씩 20명
아르라샤드당 7명
정의개발당 7명
사회운동단체 120
남부운동 85명
후시(안사룰라) 35명
무정파 120
청년 40명
여성 40명
시민사회 40명
하디대통령추천 62
565

 

예멘 6지역 분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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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 정부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분할안을 바탕으로 2014년 3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헌법제정위원 임명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강수가 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리면서 반정부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2014년 7월 유류보조금 삭감 조치가 민심을 자극하였고, 이를 기회로 삼아 6개 지역 분할안 폐지와 행정부 내 후시 참여비율 제고를 요구하면서 이전 자신들을 탄압하였던 살레 세력과 연대하여 하디 정부에 압박을 가하였고, 결국 9월에 수도 사나를 장악하였다. 이어 2015년 1월 17일 국민대화협의회 사무총장을 납치하고, 1월 19-20일에 모든 정부기관을 점령한 후 대통령 집무실에 들이닥치자 하디는 1월 22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후시는 2월 6일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국가운영을 시도하였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연금 상태에 놓여있던 하디 대통령은 2월 21일 아덴으로 탈출하여 사임을 번복하고 후시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였다고 비난한 후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가 3월 26일 수도 사나 공습을 시작하면서 예멘 전쟁이 시작하였다. 하디는 공습 당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도착하였다.

 

국제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멘 전쟁은 형식상으로는 하디가 이끄는 합법적 정부와 이를 무력으로 수도 사나에서 내쫓은 후시 반군 간 내전이지만, 하디의 요청을 받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이집트, 요르단, 모로코, 세네갈, 수단과 동맹군을 형성하여 후시 반군 공격을 시작한 국제전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고 아랍에미리트가 가장 강력하게 후원하는 연합군에서 카타르는 두 나라와 외교 불화를 빚으면서 2017년 연합군에서 빠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연합군은 후시 반군을 이란이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도움 없이 후시 반군이 현재까지 버틸 수가 없다고 본다. 더욱이 연합군은 2015년 9월에 오만 연안에서 중무기를 후시 반군에 전달하려던 이란 국적 어선을 적발하였고[5], 2016년 3월에는 미 해군이 AK-47 소총 1,500 자루, 대장갑차 휴대용 발사기 200기 등을 적재한 이란 국적 어선을 나포하여 이란이 후시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 증거로 제시하였다.[6] 또한 후시 반군의 지도자였던 후세인이 이란의 종교도시 곰(Qom)에서 머무르며 공부하였고, 레바논 헤즈볼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후시 반군 내에 12이맘파 시아가 있을 뿐더러 이란의 성직자가 안사룰라를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조직으로 비유한 것을 들어 양자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5년 1월 25일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혁명수비대 대리인 호자톨레슬람(Hojjatoleslam) 알리 시라지(ʿAli Shirazi)는 예멘에서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조직인 안사룰라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7] 물론 이란은 이 모든 의혹을 극력 부인하여 왔는데, 2017년 11월 알리 자파리 혁명수비대 사령관이 처음으로 이란이 후시반군에 조언과 정신적인 지원만 하고 있다고 밝혔다.[8]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는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이란이 아랍세계에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하게 위함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한다는 혁명이념을 내걸고 이란이 중동 무슬림 세계를 혼란과 극단주의의 늪으로 빠뜨렸다고 생각한다. 2017년 5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였을 때 살만 국왕은 1979년 이후 중동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 현재까지 이란 정권은 전 세계 테러를 이끌어왔다.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란은 선량한 이웃들을 모두 거부하였다.”[9]

사우디아라비아가 보기에 오늘날 중동과 세계를 혼미하게 만드는 무슬림 테러의 근본원인은 1979년 이란혁명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지난 30여 년간 일어난 일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 3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중동의 모습이 아니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란의] 모델을 베끼려고 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도 그 중 하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문제가 전 세계로 퍼졌다. 이제 이를 없앨 때다.”[10]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공세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공세를 맞기에 급급하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란이 만든 게임의 틀을 부수어버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란은 극단주의 종교사상을 지닌 국가라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공통의 대화를 나눌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빈 살만 왕세자의 평가다.[11] 더군다나 그가 보기에 이란은 혁명 수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나라다.

2003년 사담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같은 시아파에 속하는 이란에 유리한 역내 환경이 조성되었다. 2004년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이 걱정하면서 내뱉은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 초승달(Shiah Crescent)”이 형성된 것이다.[12]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 혼란기에 발생한 시리아 내전에서 친이란 바샤르 알아사드를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중심이 된 시아파 민병대가 지켜내면서 이란의 영향력이 아랍세계에서 더욱 강건해졌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심이 되어 시리아에서 이란 세력을 축출하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제는 친이란 후시 반군이 국경의 남쪽 예멘을 장악하였으니 실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테헤란-바그다드-다마스쿠스-베이루트로 이어지는 친이란 전선에 사나까지 포함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국가 안보를 위해 어떻게 해서라도 이란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지지를 받는 후시 반군 제거를 이번 예멘 전쟁의 목표로 삼고 있다.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국방장관이었을 때 예멘 전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여 1979년 이란혁명체제를 종식하겠다는 큰 그림의 일환이다.

내전을 넘어선 국제전의 피해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예멘 국민이다. 유엔난민기구의 공식집계에 따르면 2015년 3월 26일부터 2018년 11월 8일까지 민간인 6,872명이 죽고 10,768명을 부상당하였다.[13] 현재 2,200여만 명에게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데, 2천 8백만 명[14]으로 집계되는 예멘 인구의 80퍼센트가 국내에서 전쟁 난민으로 전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로 들어 온 예멘 난민은 대다수가 후시가 장악한 지역 출신이다.

 

전망

살레정부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힘을 빌려 후시를 와해시키려던 작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결국 오늘날 예멘전쟁이라는 내전의 모습을 띤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주축 동맹군의 이전인 2004년부터 이어 온 현상이다. 자국 내 시아의 동요를 우려하여 예멘과 접경지대인 사으다의 자이디를 진압하고 이란의 개입을 선제적으로 막으려 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세로 인해 현재 예멘사태는 국내문제를 넘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정치적 저항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제전으로 진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시반군은 아랍의 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하디 정부를 후원하며 예멘내정에 깊숙이 개입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연방 결성안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을 반대하던 살레 세력과 연대하여 경제실정을 빌미로 수도 사나를 점령하였다. 살레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동맹군과 화평의 뜻을 밝히자 그를 2017년 12월 살해하고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는 등 강경대응 기조를 유지하였다.

GCC가 사실상 와해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긴밀하게 공조하며 예멘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예멘을 후시반군에 잃으면 아랍해에서 홍해로 이어지는 길목인 바브 알만답(Bab al-Mandab) 해협이라는 전략적 통로를 제어하기 어렵고, 예멘의 혼란 속에 알카에다, 아이에스 등 극렬 세력의 발흥도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의 안보, 역내 이란세력의 제어를 위해 분할되지 않고 중앙정부의 힘이 강한 통일예멘을 존속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후시반군과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내전이 종식된다고 하여도 하디정부가 국민의 지지 속에서 행정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디정부는 출범 때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허수아비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는데 내전을 겪으면서 외세에 좌우되는 정부라는 사실이 더욱 확연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타협으로 종전이 된다고 하여도 통일된 정체를 가져본 역사가 짧고, 정치적 행위자들의 공통분모가 전무한 상태에서 상당기간 안정된 예멘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후시반군과 하디 친정부군의 대립만이 아니라,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닌 부족, 알카에다, 아이에스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얽혀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축이 되는 동맹군의 목표는 예멘을 역내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란의 영향력이 예멘에 미치지 못하도록 이란과 후시반군의 관계를 끊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정부 언론인 카슈끄지(Jamal Khashuqji, 1958-2018) 살해 사건 이후 미국과 영국은 예멘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종전 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하였지만, 진전이 더디다. 양측의 접전지는 현재 알호데이다 항구이다. 이곳을 후시반군으로부터 탈환하려는 동맹군의 집요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지만 전세는 팽팽하다. 알호데이다는 인도적 지원물품이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쟁탈전이 치열해질수록 민간인 피해가 급증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알호데이다를 서로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종전논의가 진지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62년 북예멘 자이디 시아 이맘조가 무너진 이래 역내·외 국가의 예멘 개입은 멈추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자이디 시아 이맘조가 붕괴하고 내전이 발발하였을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정파를, 이집트는 공화정파를 지원하였다. 통일예멘의 살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을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이용하였고,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지만, 국가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후시반군과는 때에 따라 적대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국은 알카에다를 제어하기 위해 후시반군과 일정부분 협력하기도 하였다. 예멘을 둘러싼 역내·외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예멘 내정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였고, 예멘 권력자는 이를 통해 정권 유지를 도모하였다.

고대 로마로 이어지는 아라비아 향료무역을 담당하였던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 예멘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지 오래다. 이제 예멘은 실패한 국가의 실상을 온전히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라로 전락하였다. 후시반군의 등장과 함께 예전에는 엷었던 종파정체성마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애쓰기보다 권좌에만 집착한 지도자를 둔 나라가 어떻게 스러지는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을 때 외세에 어떻게 휘둘리는지 예멘은 아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실로 ‘비참한 아라비아(Arabia Misera)’가 되었다.

 

저자 소개

박현도 교수(hyondopark@hanmail.net)
명지대학교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이다. 서강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맥길대학교에서 이슬람학으로 석사, 박사 수료 후 이란 테헤란대학교 신학·이슬람대학 종교·신비주의학과에서 이슬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슬람사가 주 전공이다. 최근 『세계의 이슬람』, 『이란을 가다』 등을 공동 저술하였고 다수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1]이 발표문은 다음 글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1) 2015년 5월 30일 “변환기의 이슬람 사회”라는 주제로 열린 제4회 선문이슬람센터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글 “자이디 시아: 예멘의 후시 반군 성격 이해하기”를 수정·보충하여 선문이슬람센터 발간 논총에 게재한 “예멘 후시 반군이 성격 이해하기,” 『이슬람세계』 4권(2015년), 59-70쪽; (2) 필자의 월간조선 기고문 “‘제주 난민’ 사태 불러온 예멘은 어떤 나라인가,” 『월간조선』, 2018년 8월호, 390-397쪽; (3) 2018년 7월 24일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와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공동개최 예멘 긴급진단 세미나 발표문 “예멘 전쟁의 원인과 전개상황”; (4) 2018년 8월 14일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주최 이슬람 전문가세미나 발표문 “예멘난민의 형성과정”; (5) 2018년 11월 3일 자유통일칼리지 강연문 “예멘 통일의 교훈.”

[2]CIA, The Worldfactbook: Yemen.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ym.html (검색: 2018년 7월 15일).

[3]Pew Research Center, “Global Religious Landscape,” Report Materials – Table: Religious Composition by Country.
http://www.pewforum.org/files/2012/12/globalReligion-tables.pdf (검색일: 2018년 7월 20일)

[4]Charles Schmitz, “The Huthi Ascent to Power,” Middle East Institute, September 15, 2014. http://www.mei.edu/content/at/huthi-ascent-power (검색일: 2015년 5월 1일)

[5]“‘Caught Red-Handed’: Coalition Says It Seized Iran Boat with Arms for Yemen Rebels.”Gulf News. September 30, 2015.

[6]“Third Illicit Arms Shipment in Recent Weeks Seized in Arabian Sea,” USA Navy, April 4, 2016. http://www.navy.mil/submit/display.asp?story_id=93990 (검색: 2018년 7월 13일).

[7]Shahid Shahidsaless, “Does Iran Really Control Yemen?” Al-Monitor, February 12, 2015. http://www.al-monitor.com/pulse/originals/2015/02/iran-yemen-houthis-axis-of-resistance.html# (검색일: 2015년 2월 14일).

[8]Iran Providing Yemen with Advisory Assistance: IRGC Commander,” Tasnim News Agency, November 24, 2017.
https://www.tasnimnews.com/en/news/2017/11/24/1582883/iran-providing-yemen-with-advisory-assistance-irgc-commander (검색: 2018년 7월 15일).

[9]Narjas Zatat, “Iran is the ‘Spearhead of Global Terrorism’, Saudi King Claims,” The Independent, May 21, 1917.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middle-east/saudi-arabia-king-salman-iran-spearhead-global-terrorism-donald-trump-arab-summit-us-arms-deal-a7747811.html (검색: 2018년 7월 16일).

[10]“I Will Return Saudi Arabia to Moderate Islam, Says Crown Prince,”The Guardian, October 24, 2017.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7/oct/24/i-will-return-saudi-arabia-moderate-islam-crown-prince (검색: 2018년 7월 16일).

[11]Staff Writer, “Watch & Read: Mohammed Bin Salman’s Full Interview,” Al Arabiya English, May 3, 2017.
http://english.alarabiya.net/en/features/2017/05/03/Read-the-full-transcript-of-Mohammed-Bin-Salman-s-interview.html (검색: 2018년 7월 15일)

[12]“King Abdullah II of Jordan,” Hardball with Chris Matthews, MSNBC, December 9, 2004.
http://www.nbcnews.com/id/6679774/ns/msnbc-hardball_with_chris_matthews/t/king-abdullah-ii-jordan/#.W1J0BE0naUl (검색: 2018년 7월 15일)

[13]United Nations Human Rights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Yemen Humanitarian Update, Covering 7 – 21 November 2018 / Issue 32.” November 23, 2018.
https://reliefweb.int/report/yemen/yemen-humanitarian-update-covering-7-21-november-2018-issue-32 (검색: 2018년 11월 30일)

[14]CIA, The Worldfactbook: Yemen.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ym.html (검색: 2018년 7월 15일).

 


참고문헌

  • Boucek, Christopher. 2010. “War in Saada: From Local Insurrection to National Challenge,” Carnegie Papers No. 110,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Middle East Program, April.• Madelung, Wilferd. 2002. “Zaydiyya,” in Encyclopaedia of Islam, new ed., vol. 11, 477-481.
  • Clark, Victoria. 2010. Yemen: Dancing on the Heads of Snake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 Eshaq, Alia, and Suad Al-Marani. 2017. Assessing the EU’s Conflict Prevention and Peacebuilding Interventions in Yemen. Political Development Forum, March 24.• Pradhan, Prasanta Kumar. 2017. Arab Spring and Sectarian Faultlines in West Asia: Bahrain, Yemen and Syria. New Delhi: Pentagon Press.
  • Salmoni, Barak A., Bryce Loidolt, and Madeleine Wells. 2010. Regime and Periphery in Northern Yemen: The Huthi Phenomenon. Santa Monica, CA.: The RAND Co.
  • Selvik, Kjetil and Stig Stenslie. 2011. Stability and Change in the Modern Middle East. New York: I. B. Tauris.

 

*본 기고문은 전문가 개인의 의견으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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