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후로 이스라엘은 내부의 극우 보수주의 정부와 외부 테러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받아 왔다. 하지만 안보 포퓰리즘에 기댄 권위주의적 정부의 시민 사회 통제는 점차 시민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네타냐후 총리가 비리 혐의로 기소된 이후 2023년에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내용이 담긴 사법개편안을 발표하자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시위를 일으켰다.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어 내며 단호하게 맞선 사법개편반대시위는 시민들이 세대와 계층, 종교, 정치적 당파를 초월해 연대한 이례적인 시위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방식을 재고하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유대주의와 민주주의의 공존은 가능한가?
V-Dem 민주주의 지표 보고서(2024)1)에 따르면, 2023년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지표는 ‘자유 민주주의’에서 ‘선거 민주주의’로 하락했다. 이코노미스트가 발행하는 민주주의 지표(2024)2)에서도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하향되었는데, 그 원인으로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개편안 발표가 지목되었다. 사법개편안은 사법부 판사 최종 임명권을 정부에 부여하고, 내각과 장관들에게 법적인 조언을 거절, 또는 반대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사법부를 무력화시킬 뿐만 아니라 소수자의 권리, 학문의 자유와 예술적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반민주주의 법안이다. 10개월에 걸친 시민들의 반대시위 끝에 결국 사법개편안은 철회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주주의가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더 분명해졌다.
최근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정치, 사회적 혼란의 기저에는 이스라엘 국가 정체성에 내재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종족, 종교적으로 이질적인 복합사회 이스라엘에서 민주주의와 종교는 항상 논쟁과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은 ‘민주주의’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국민이 선출한 의회가 헌법을 제정한다는 민주주의 가치와 핵심 개념을 포함하며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의 현재 인구는 대략 980만 명으로 유대인(74%), 아랍인(21%), 기타(5%)로 구성된다.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출신지에 따라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 출신인 미즈라힘(Mizrahim)과 유럽 및 미국 출신의 아슈케나짐(Ashkenazim)으로 범주화되며, 종교적으로 하레딤(Ultral-Orthodox), 다티(relligious), 전통파(traditional), 세속파(secular)로 구별된다. 아랍계 이스라엘인은 종교에 따라 이슬람교, 기독교, 드루즈교로 분화되는 등 인구 구성 스펙트럼의 폭이 넓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종족·문화적 이질성 외에도 전통, 보수주의, 민족주의, 진보주의, 개인주의 등 정치적 다양성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진다. 이스라엘 시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특히 팔레스타인 점령지를 둘러싼 입장을 기준으로 크게 좌파와 우파로 구분된다. 건국 이후 특히 욤 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 1973), 레바논전쟁(1982), 오슬로협정(Oslo Accords 1993), 인티파다(Intifada 2000)를 겪으면서 정치적 양극화가 뚜렷해졌으며, 2006년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Hamas)가 집권한 이후로 정치적 우익화가 강화되었다. 전쟁 및 테러의 위협과 생존을 담보로 삼는 독재적인 정부 사이에서 이스라엘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시민과 정부: 새로운 관계의 지형
국가 건설과 사회적 통합이라는 과제에 직면한 건국 초기에 이스라엘에서는 주변국들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민족 서사와 국가 안보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이러한 특수한 환경에서, 정부와 시민은 후원 관계에 가까웠으며, 생존과 통합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정당과 시민은 권위주의적인 정부에 의지하면서 충성스러운 조력자로 기능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된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로 대표되는 극우 정치세력은 국민을 대상으로 ‘안보 포퓰리즘(security-driven populism)’에 기댄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적인 수사학을 구사해 왔다(Levi & Agmon, 2021). 하지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나 단체를 철저히 통제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시민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시민들은 점차 집단적 의사결정과 같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수동적 충성’에서 ‘적극적 대응’으로 정부와의 관계를 변화시켜 나갔다(Yishai, 1998).
정치,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변화를 겪은 1970년대 초에 일어난 ‘블랙 팬더스 운동(Mizrahi Black Panthers Protest)’(1971)과 ‘페미니즘 운동’은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아슈케나짐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미즈라힘 청년들이 일으킨 블랙 팬더스 운동은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과 주류 사회의 가치를 위협했다는 이유로 무력 진압되었지만 건국 이래 종족-계급적 갈등과 불평등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시위였다. 페미니즘 운동은 욤 키푸르 전쟁 기간에 ‘남성은 전쟁터, 여성은 가정에서’라는 전통적인 성별 분업이 강조되자 불평등을 자각한 여성들이 1973년 페미니스트 정당 라츠(Movement for Civil Rights and Peace)를 창당하면서 본격화되었다(임안나, 2023). 당시 이 운동의 주요 현안인 낙태 합법화는 출산을 통한 유대민족의 재생산 의무와 상충하며 국가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수용되지 못했지만, 정당 후원에서 벗어난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진다(Herzog, 2004).
욤 키푸르 전쟁은 페미니즘 운동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적 개입으로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선례를 제공했다. 전쟁 종료 후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면서 대중 시위와 청문회를 연달아 열었고 이는 결국 골다 메이어(Golda Meir) 총리의 사퇴로 이어졌다. 1977년 5월 선거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당에서 리쿠드당(Likud)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주요 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의 집권은 이스라엘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미즈라힘의 전폭적인 지지가 만들어 낸 변혁이었다(Peled, 2019).
‘텐트혁명’: 물가상승시위에서 사회정의운동으로
이스라엘 국가-시민 관계의 변화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 사건은 경제 발전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 세대가 신자유주의 정책이 초래한 불평등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되면서 촉발된 2011년 ‘텐트시위’다.3) 2011년 7월 14일, 텔아비브에 거주하는 20대 여성 다프니 리프(Daphni Leef)가 살인적인 물가와 주택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페이스북에 텔아비브 하비마 광장(Habima Square) 텐트시위 이벤트를 개설했는데, 며칠 만에 수천 명이 ‘참석’ 표시를 했다. 시위 첫날 경찰의 통제선 설치로 인근 로스칠드대로(Rothschild Boulevard)로 옮겨간 이 시위는 공영방송뿐 아니라 소셜네트워크, 블로그 같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집회 일정 등 정보 확산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참가자 규모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내 전국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거주지 근처의 거리와 광장에 텐트를 설치하면서 전국적 규모의 시위로 발전했다.
세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다양한 계층의 자발적인 참여와 새로운 시위문화의 등장, 온라인과 오프라인상에서의 활발한 상호작용이 두드러진 이 시위는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의 등장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다. 임대료 인하 요구로 시작된 시위의 관심사는 점차 복지, 교육, 의료 문제로 확장되면서 경제구조와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며 ‘사회정의운동(Social Justice Movement)’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텐트시위는 다양한 집단을 동등하게 포괄하는 새로운 정치적 언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남겼지만, 시민들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정치적 분쟁에 가려져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경제, 사회정의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혁명과도 같았다.4) 텐트시위 현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토론 장소가 되었으며 거리를 오가다 들리는 사람들의 참여로 더욱 활기를 띠었다. 강연, 토론, 콘서트,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분위기는 마치 축제와 같았다.

출처: Israel Government Press 작가: Moshe Milner
텐트시위 이후 많은 시민단체가 조직되고 시민의 정치적 참여가 더욱 활발해졌다. 몇 가지 예를 들면, 2013년에는 병역 면제 대상인 하레딤(초정통파 종교 유대인)의 징집을 허용하는 법 개정이 발표되자 하레딤이 반대시위를 벌였으며, 전통적으로 (반)유목 거주방식을 이어온 베두인 강제 이주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베두인들은 격렬한 반대시위로 맞서 이주계획을 철회시켰다. 2014년 가자 전쟁 시기에는 전쟁반대시위와 지지시위가 동시에 일어났고, 2015년에는 에티오피아 유대인이 차별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신규 이민자, 종족, 계급에 따른 불평등의 문제가 재점화되었다. 특히, 네타냐후의 비리 의혹이 불거진 2016년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위는 민주주의 위기론을 불러일으키며 2020~2021 검은 깃발 시위(Black Flags Protest), 2023년 사법개편안에 반대하는 반네타냐후, 반정부시위로 이어졌다.
검은 깃발을 든 시민 영웅들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에서 직접투표로 선출(1996)된 최초의 총리로, 2009년 선거에서 연정 구성에 성공한 이래 2021년 6월 13일까지 12년간 총리직을 연임한 인물이다. 2022년 12월 29일 재취임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2017년 1월 뇌물수수, 사기, 배임 혐의로 기소되면서 이스라엘 최장수 총리이자 형사재판을 받는 첫 현직 총리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특정 기업에 대한 규제 혜택과 잠수함 계약 비리 등 정치적 부패 의혹으로 수사가 이어졌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마녀사냥’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2020년 9월 18일 밤 2차 코로나 봉쇄조치가 시작되었을 때 정부의 과도한 시위대 진압이 네타냐후 총리의 재판을 연기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여론의 거센 비난이 고조되었다.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재판을 피해 온 네타냐후의 행보에 시민들이 자택 발코니와 시위 현장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흔들면서 이른바 ‘검은 깃발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5)
2011년 텐트시위와 마찬가지로, 검은 깃발 시위를 전후로 해서 다양한 시민단체가 새로 조직되거나 기존 단체들이 검은 깃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 활동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2016년부터 고향 마을에서 홀로 반네타냐후 시위를 펼치던 공군 장교 출신 아미르 하스켈(Amir Haskel)은 검은 깃발 시위를 통해 알게 된 참가자들과 함께 2020년에 노웨이운동(No Way Movement)을 설립했다. 이 외에도, 네타냐후 총리가 비리 혐의로 기소된 직후인 2018년에 진상 조사와 네타냐후 퇴진을 요구하며 설립된, ‘크라임 미니스터(Crime Minister)’로 더 잘 알려진 호제 하다쉬(New Contract), 2020년 8월에 검은 깃발 시위 현장에서 만난 20대 청년 예술가들이 조직한 핑크프론트(Pink Front) 등이 있다.
검은 깃발 운동은 16개 이상의 시민단체가 이끄는, 세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대규모 연합 시위였지만, 시위의 주체는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으며, 중앙집권적인 리더십 없이 이루어진 수평적 시위였다. 일례로, 정부 보안국(Public Security Ministry)이 시위자 대표와 만나기 위해 텐트시위 때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시위 현장을 실시간 생중계했던 독립 저널리스트 오르리 바를레브(Orly Barlev)와 접촉했지만 오르리는 이 시위가 특정한 대표자가 있을 수 없는 ‘대중 시위’라며 정부 관계자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오르리 뿐만 아니라 이 시위의 활동가들은 모두 시위의 리더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청년 예술가 이타이 잘라이트(Itay Zalait)가 이 시위를 이끈 평범한 시민들에 대한 경의를 담아 제작한 동상 ‘이스라엘의 영웅’은 검은 깃발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6)

출처: Itay Zalait
2021년 6월 13일, 연정 수립에 실패한 네타냐후가 12년간 연임한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15개월간 끈질기게 이어진 검은 깃발 시위는 ‘역사적 승리’를 선언하고 해산했다. 하지만 2023년 1월에 다시 출범한 네타냐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사법개혁을 발표했다. 발표 직후인 1월 7일, 네타냐후 총리가 비리 혐의에 대한 자신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법개편안을 추진하려 한다는 비난이 더욱 거세지면서 예루살렘의 네타냐후 관저와 텔아비브 카플란 거리(Kaplan Street)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개최되었다. 특히 매주 토요일 정기적으로 시위가 열린 텔아비브의 카플란 거리 일대가 시위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이 시위는 ‘카플란시위’로 불리기 시작했다.7) 부정부패 척결과 네타냐후 퇴진을 주요한 목표로 내세웠던 검은 깃발 운동은 사법개편안 발표를 계기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이례적인 반정부운동을 등장시킨 것이다.
사법개편반대시위, 양극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모색
이스라엘은 성문헌법이 없고 쉽게 수정 가능한 기본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반이 취약하다. 다당제와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권력 견제 기관인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하는 사법개편안은 독재주의로의 퇴행을 의미한다. 사실, 정부에 의한 극단적인 형태의 권력 행사는 사법개편안 발표 이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져 왔다. 2016년에 외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NGO가 모든 정보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투명성 법안(Transparency Law) 통과 후 정부를 비판하는 단체를 억압하려 한다는 비난이 일었고, 2018년에는 비유대인, 특히 아랍인의 권리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유대민족국가법(Jewish Nation-State Law)이 통과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법개편안이 발표되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많은 이스라엘 시민들은 단호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사법개편반대시위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재계와 지방정부, 노동조합(Histadrut),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힘을 합친 사례를 보여준다. 사법개편중단을 촉구한 국방부 장관에 대한 해고 발표 다음 날,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노동조합과 대학은 무기한 파업을 발표했고, 하이테크산업, 공항, 의사협회, 150개의 대기업이 소속된 이스라엘 비즈니스 포럼(Israel Business Forum)의 파업으로 확산했으며, 미국과 영국 등 재외 이스라엘대사관도 외교관 파업에 동참했다. 이스라엘 국적기 엘알(EL-AL)의 조종사들도 네타냐후 총리 부부의 로마 방문 비행을 보이콧했다. 이스라엘 학자들은 해외 학자들과 연합해 사법개편안이 ‘인종 청소’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런 대규모 연합 시위가 즉각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텐트시위부터 검은 깃발 운동을 겪는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빠른 정보 공유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깃발 운동과 비슷하게, 퍼레이드나 공연 등 비폭력 시위로 진행된 사법개편반대시위는 개인과 단체들이 연대하는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초기에 시위를 주도한 카플란포스(Kaplan Force), 보놋 알터나티바(Women Building an Alternative), 전우회(Brothers and Sisters in Arms), 스탠딩투게더(Standing Together), 크라임미니스터, 핑크프론트(Pink Front), 쿠미이스라엘(Kumi Israel), 학생연합(Students Union)은 대부분 검은 깃발 운동에 참여했던 단체들이다.
각자의 아젠다를 들고 시위운동을 해오던 여러 단체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바탕으로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 광범위한 참여가 동원된 대규모 시위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여성단체 ‘보놋 알터나티바’는 사법개편안의 내용이 가부장적이고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사법개편이 이루어지면 가장 먼저 위협받는 건 여성이며,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법개편반대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시위 중에 맞이한 ‘국제 여성의 날’에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의 등장인물인 노예 소녀를 상징하는 흰색 모자에 붉은 망토를 입고 거리와 해변으로 나갔다. 사법개편안이 통과될 경우 여성들이 느끼게 될 공포와 분노가 무엇인지를 재현하는 ‘침묵의 반란’이었다.

출처(좌): Wikimedia Commons 작가: Hanay
출처(우): flickr.com 저자: Eyal Peleg
IDF 예비역들이 만든 단체인 전우회의 회원들은 각자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법개편안이 철회될 때까지 예비역 복무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전시에 예비역에 의존하는 구조를 가진 이스라엘에서 예비역들이 공개적으로 저항에 나섰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한편, 2023년 9월 3일 텔아비브에서 230명의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독재에 반대하는 청소년들(Noar Neged Diktatura)’ 역시 공개서한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IDF 복무 및 정착촌 복무를 거부하겠다는 의사가 포함되었다. 공개서한은 ‘민주주의가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에게 보장될 때까지 병역의 의무를 거부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스라엘 일간지 하아레츠(HaAretz)와의 인터뷰에서, 한 청소년은 “이번 사법개편안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상황에 눈을 뜨고 팔레스타인영토 점령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HaAretz 23/9/4).
사법개편을 둘러싼 논쟁은 기존의 정치적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기존의 사회 구조적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위가 정치적 성향과 당파를 초월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회가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시위를 통해 시민들은 단지 사법개편안 철회와 네타냐후 퇴진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낙태법, 이민, 소수자 차별, 경제 위기 같은 문제를 보편적으로 포괄하는 민주주의의 방식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표출했다. 2024년 1월 1일, 마침내 이스라엘대법원은 사법개편안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핵심 원리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라는 판결을 내리고 무효화했다. 대법원 내부에서 입장이 팽팽하게 갈리기는 했지만, 대법원이 기본법 일부를 무효화 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주주의의 역설, 생존의 딜레마
사법개편 무효화로 위기는 모면한 듯 보이지만, 2023년 10월 7일에 일어난 하마스(Hamas)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는 또 다른 위기를 겪으며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하마스가 가자 국경 인근 축제 현장과 키부츠를 급습해 어린이를 포함한 이스라엘 시민 1,200여 명이 사망했으며 250명 이상의 인질이 발생했다. 납치 사건 이후 시간이 흐르며 상당수의 인질이 가자지구에서 사망했지만, 정부가 인질 석방에 적극적이지 않자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인질 귀환을 위한 정부 대책과 휴전을 요구하며 매주 토요일 텔아비브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다. 사건 발생 후 1년 3개월 만에 1단계 휴전의 조건으로 시신 8구를 포함한 33명의 이스라엘인 인질과 태국인 인질 5명이 팔레스타인 수감자 약 1,700명과 교환되었다. 하지만 2025년 3월 2일에 1단계 휴전이 종료된 이후 2단계 휴전 조건을 둘러싸고 하마스와 이스라엘 정부 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 휴전 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출처: shutterstock.com 작가: Yehuda Bergstein
건국 이후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내부의 극우 보수주의 정부와 외부 테러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받아 왔다. 사법개편반대 시위대가 “네타냐후 정부가 지향하는 이스라엘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스라엘과 다르다”라고 외친 것처럼,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석은 단일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오랫동안 민주주의에 걸림돌이 되어온 양극단의 위협을 극복하고 ‘건강한 민주주의’의 반석을 다질 수 있을 것인가? 지난 십 년의 시위 과정을 되돌아보며, 주류가 억압해 온 문제와 현실을 직시하려는 많은 이스라엘 시민들의 용기와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려는 적극적인 토론 문화가 이스라엘을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저자소개
임안나(modicum@hanmail.net)는
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다. 이스라엘 Tel Aviv University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 『Filipino Care Workers in Israel』(2025),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2023)(편저), 주요 논문으로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한국 이주와 연결망”(2023), “초국가적 노동 이주와 귀환”(2022), “미등록 이주 아동 합법화 논쟁을 통해 본 이스라엘 시민권의 재구성과 전망”(2021),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의 종족성과 정체성”(2019)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임안나. 2023. “‘군대의 꽃’과 ‘여전사’의 표상을 넘어: 이스라엘 여성의 군 복무와 의미화의 궤적”,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Herzog, H. 2004. “Family-military Relations in Israel as a Genderizing Social Mechanism.” Armed Forced & Society, 31(1), 5-30.
- Levi, Y. & Agmon, S. 2021. “Beyond culture and economy: Israel’s security-driven populism.” Contemporary Politics, 27(3), 292-315.
- Peled, Y. 2019. “Mizrahi Jews and Palestinian Arabs: Exclusionist attitudes in development towns.” In Yitfachel, O. Ethnic Frontiers and Peripheries. Routledge.
- Yishai, Y. 1998. “Civil society in transition: Interest Politics in Israel.” The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555(1), 147-162.
- Dayan, Linda. 2023. “The Overhaul Opened Their Eyes: Israeli Youth Publicly Refuse Draft.” HaAretz.
https://www.haaretz.com/israel-news/2023-09-04/ty-article/.premium/we-wont-serve-the-dictatorship-in-the-west-bank-israeli-youth-publicly-refuse-draft/0000018a-5e9e-d845-adfe-fefee2380000(검색일: 2024.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