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연(아시아연구소)

2023년 걸프 국가들은 다이나믹한 중동 역내 외 정치 변동의 중심에 있었다. 먼저 올해 초 3월 중국 중재로 타결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관계 정상화 합의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동 합의로 사우디와 이란은 단절된 외교 관계를 복원하고 상대국에 대사관은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욱 화제가 되었던 것은 중재자가 그동안 중동 정치 분쟁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미국 등과 같은 전통적인 국가가 아닌 중국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우디와 이란이 왜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중국이 왜 중재에 나섰는지 그리고 중국 중재 역할이 지니는 함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더욱 집중되었다. 중국이 중재하여 중동의 주요 역내 패권 세력인 사우디와 이란이 관계 정상화 합의를 이루었다는 점은 중동 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리고 오랜 기간 갈등의 실마리를 보이지 못했던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 정상화는 무엇보다 양국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낮추고 국가의 실리적 이득을 확보하겠다는 판단이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사우디-이란 관계 정상화 소식과 함께 올해 중순 일각에서는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관측도 들리기 시작하였다. 사우디는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최고 수준의 안보 보장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수준의 고강도 안보 협정 체결, 미국의 무기 금수 조치 해제, 민수용 핵프로그램 개발 허용 등을 미국 측에 요구한 것이라는 관측이 돌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지난 9월 G20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ndia-Middle East-Europe Economic Corridor, IMEC)을 발표했다. 이 구상안은 인도, UAE, 사우디, 요르단,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동부 회랑과 이들 중동 국가와 유럽을 연결하는 북부 회랑으로 구성된다. 즉, 인도-중동-유럽을 철도, 도로 및 항구 등의 인프라로 연결하여 이 지역을 하나의 경제 벨트로 묶고자 하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서 미국은 중국의 중국-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일대일로에 맞대응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러한 구상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우디와 이스라엘 대륙 간 연결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가 선행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라는 중동의 대대적인 정치적 변동이 감지되는 상황 속에서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의 전대미문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의 주역이었던 걸프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이번 분쟁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자세는 보이지 않아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란의 경우도 하마스의 배후에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지만 이란도 2022년 반히잡 시위 이후 국내 정세 안정이 우선 순위인 동시에 지속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개입할 여력이나 동기 요인이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중동 정치 지형 변화는 잠시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역내 관계 재정립과 함께 걸프 국가들은 지속해서 다자주의 외교 전략을 꾀하고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 유지도 지속하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력 구도도 동시에 확대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8월 남아공에서 개최된 15차 브릭스(Brics) 정상회담에서 사우디, 이란, 이집트, UAE, 에티오피아, 아르헨티나 6개국이 신규 회원국이 된 것이다. 걸프 국가들의 브릭스 회원 가입은 미국에 의존했던 기존의 외교 관계 구조에서 탈피하여 중국과 러시아 등의 새로운 세력과 협력하여 외교 다자주의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걸프국을 둘러싼 역내 외 정치 구조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사우디는 2030년 리야드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이 되었고 UAE는 12월 유엔기후변화 협약 총회를 개최하면서 세계적인 위상을 지속해서 확보해가고 있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걸프 국가들을 둘러싼 역내 정치적 변동은 잠시 숨고르기 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걸프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전쟁 종식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이나 행동은 보여주지 못했다. 걸프 국가들의 우선 순위는 경제 개혁을 통한 왕권 안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걸프 국가들이 전쟁에 적극 개입할 유인책이 없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현재의 전쟁 국면이 진정세에 돌입하게 된다면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라는 새로운 노력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화되어 이란 혹은 시아파 프록시 단체들이 전쟁에 대한 관여를 확대한다면 중동 정세는 더욱 불확실해지고 걸프 국가들의 새로운 정치 시도는 지속해서 지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편, 2024년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여파와 함께 여러 메나 지역 국가들에서 대통령 혹은 의회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메나 지역 국가 특성상 선거 결과로 따른 정치적 변동은 크게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부정 선거에 따른 대중 불만이 고조되어 자칫 시위로 확산한다면 걸프 국가로도 여파가 미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이와 함께, 2024년 예정된 미 대선 과정 및 결과도 걸프 국가들의 향후 정치적 전략 수립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2024년 중동의 주요 패권 국가들이 밀집해있는 걸프 지역은 여전히 중동의 정치 변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각자의 생존 전략 마련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