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 시내에 있는 환전소에서 100달러를 내밀었더니 레바논 화폐 한 뭉치를 건네주었다. 1달러는 레바논 리라 9만3000파운드에 달했다. 국제사회에서 레바논 화폐단위를 파운드로 부르고 있으나 레바논 사람들은 ‘리라’라고 한다. 은행권 앞면에는 ‘리브르(livre)’로 표기돼 있다. 식당뿐 아니라 골목의 작은 슈퍼마켓에서도 모든 물품의 가격은 달러로 적혀 있었다. 주레바논 대한민국 대사관의 경제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월 경제무역부 장관은 “모든 식료품 가게에서 달러화 가격 표시제를 시행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레바논 사회에서 달러화의 통용이 일상화된 것이다.
1992년 레바논은 오랜 내전을 끝내고 국제사회와 라피크 하리리 총리의 주도 아래 재건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채무가 늘어난 데다 집권세력의 부패로 빈곤, 불평등, 실업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시리아 난민 유입, 코로나19와 베이루트항 폭발 사고로 주요 수입원인 관광산업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해외 이주자들의 국내 송금이 서민 가계를 지탱하는 유일한 자금이 됐다.
하지만 달러화 가격 표시제와 이른바 ‘해외 송금 경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레바논 정치학자 알샤라바티 교수는 칼럼에서 국가경제를 악화시킨 주요 원인으로 심각한 정경유착 구조를 지적한다.
과거 군벌세력이 정부 요직에 진출하고,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 금융 분야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나랏돈은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빈부격차는 커지고, 중산층은 몰락하게 됐다. 종파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엔 정치권력의 금융 사유화와 공공 부문에 대한 통제 강화가 오늘날 레바논 화폐가치를 90% 넘게 평가절하시킨 주요 원인이 됐다. 레바논 정치권을 ‘구시대 마피아 계층’이라고 날선 비판을 하는 알샤라바티 교수는 “청년세대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세계경제포럼 조사에 따르면 레바논은 수학·과학교육의 질이 세계 141개국 중 4위, 고등교육의 질은 18위, 디지털 역량은 23위로 높은 순위에 올라 있다. 하지만 레바논 청년들은 일자리와 생계를 위해 고국을 떠나고 있고, 두뇌 유출은 가속화하고 있다. 레바논을 떠나는 날 보았던, 스프레이로 고가도로 벽면에 쓴 “절대 희망을 멈춰서는 안 된다”라는 문구가 잊히지 않는다.